“1990년 이어령 문화부 장관 덕에 『아리랑』 집필 위한 중국 취재 가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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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1990년 봄, 작가 조정래(사진)씨는 무력감에 빠졌다.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단행본 출간을 마치고 또 다른 대하소설인 『아리랑』 집필을 위한 취재차 중국에 가려 했으나 당국이 허가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문화부가 이런저런 트집을 잡았지만 배후에는 정보당국이 있었던 게 분명해 보였다. 지리산 빨치산들을 다룬 『태백산맥』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이 내사 중인 만큼 저자 조씨를 출국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조씨는 문화부의 담당 국장에게 거세게 항의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어령 당시 문화부 장관이 조씨를 불렀다. 이 장관은 “새 작품 쓰러 간다”는 조씨의 말에 2~3 초간 뜸들이다 “그래. 가야지”라고 한숨 쉬듯 말했다. 순간 조씨는 이 장관의 눈빛에서 ‘말썽 없이 다녀와야 한다’고 당부하는 평론가 이어령의 메시지를 읽었다고 한다.

그 뒤 조씨의 중국행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정보당국도 ‘협조’로 돌아섰음은 물론이다. 이 장관의 호출은 말하자면 장관이 조씨의 안전한 여행을 보증 선다는 점을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조정래(66)씨가 이런 일화를 담은 산문집 『황홀한 글감옥』(시사IN북)을 펴냈다. 자신의 현대사 3부작인 『태백산맥』『아리랑』『한강』의 집필 뒷얘기와 승려였던 아버지에 대한 회고, 링컨 초상화를 그려 아내 김초혜씨의 마음을 샀던 일 등 ‘인간 조정래’의 맨살을 드러내는 자전적 내용을 담았다.

책은 독자가 묻고 조씨가 답하는 형식이다. 독자 질문은 대학생 등 젊은층 250명에게서 받은 500여 개 항목에서 추려낸 84개다. 때문에 눈길 가는 대목별로 독서가 가능하다. ‘태백산맥 필화’ 사건을 다룬 꼭지에는 이어령 당시 장관이 도와줬던 이야기가 더 나온다. 평론가 김상일씨가 조씨에게 유리한 문화부 의견서를 작성하도록 해 검찰의 무혐의 판정을 이끌어낸 것이다. ‘경제학자 박현채’ 꼭지에서는 『태백산맥』 연재를 눈여겨본 박씨가 조씨에게 전화를 걸어와 “앞으로 빨치산 야그가 본격적으로 나와야 쓸 것 같등마, 워째, 나가 그짝얼 쪼깨 아는 것이 있응께로 들어볼 맴이 있소?”라며 도움을 자청했던 사연이 소개된다.

‘박태준’ 현 포스코 명예회장 꼭지에서는 박 명예회장이 자택을 판 돈 10억원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한 사실을 공개했다. 6일 연 기자간담회에서 조씨는 “한국의 경제 성장을 다룬 『한강』 집필을 하다 보니 포항제철을 일군 박태준씨가 엄청난 인물이란 점을 알게 됐고 그의 인간적인 도덕성·진실성 등에 감동받았다”며 “그에 대한 응답 차원에서 박태준 관련 글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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