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야당 계좌 어디까지 뒤졌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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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검찰이 '세풍 (稅風)' 사건 수사를 이유로 한나라당의 후원회 계좌까지 필요 이상으로 광범위하게 뒤져 파문이 일고 있다.

이것이 한나라당의 주장대로 '의도적인 야당사찰' 인지 여부부터 가려야겠지만, 이와 별도로 이번 파문이 '내 지갑을 누군가가 들여다 보고 있다' 는 일반국민의 광범위한 불안감을 업고 있다는 점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여당에서는 "야당이 세풍사건의 본질을 흐리기 위해 정치공세를 펴고 있다" 고 주장하지만 국세청을 이용해 대선자금을 거둔 사건을 엄정히 수사하는 일과 계좌추적 과정에서의 탈법.야당사찰 의혹은 별개로 다뤄야 한다고 본다.

두말할 것도 없이 계좌추적권의 남용 여부는 신용사회나 민주주의 질서 정착 정도를 가늠케 하는 민감한 사안이다.

물론 "일단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으면 금융기관은 관례상 계좌 개설시점 이후의 거래내역 일체를 넘겨주며, 우리는 수사대상 기간 이외의 거래내역은 들춰보지 않았다" 는 검찰측 해명에도 일리는 있다.

이번 파문만 해도 검찰이 관련법에 따라 한나라당에 계좌추적 사실을 '성실히' 통보해준 데서 비롯됐다.

그러나 볼 것만 보고 다른 것은 보지 않았다는 검찰의 말을 국민이 얼마나 믿어줄지 의문이 가는 게 사실이다.

검찰은 바로 얼마전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을 수사하면서도 뚜렷한 혐의가 없는 진형구 (秦炯九) 전 대검공안부장의 가족 10여명의 계좌까지 뒤지지 않았는가.

특히 계좌추적권이 야당에는 가장 민감한 '돈줄' 을 겨냥할 때는 그만큼 신중하고 한정적 (限定的) 이어야 한다고 우리는 본다.

지난 시절 야당탄압 수법을 상기할 필요도 없이 현재 여야 정당의 후원회 모금액 격차만 봐도 야당 계좌 추적은 순수한 수사목적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검찰이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한나라당의 돈사정을 추적하고, 나아가 후원회원 명단까지 확보했다는 의혹을 받는 것은 수사편의주의에 빠진 탓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압수수색 영장에 '관련 연결계좌' 라는 단서를 붙여 결과적으로 누구의 어떤 계좌라도 추적할 수 있는 허가장처럼 이용하는 것은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법의 본래 취지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안그래도 지난해 본지가 조사, 보도한 데 따르면 정치권 사정이 한창일 때는 계좌추적 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그 사실을 계좌주인에게 아예 통보조차 하지 않은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검찰은 이제라도 영장발부.계좌추적 과정의 의혹에 대해 보다 상세히 해명하고 거래내역 자료들을 사후에 어떻게 처리했는지도 납득할 수 있게끔 밝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정치검찰' 이란 불명예를 또한번 쌓지 않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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