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외세의 선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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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코소보에서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가 추구해 온 원칙은 세 가지다.

자치와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간의 관용이다.

세 가지 다 좋은 원칙이다.

공산권의 붕괴와 유고슬라비아의 해체가 시대의 대세라면 코소보의 자치권 강화가 이에 발맞추는 길이었다.

그런데 90년대 들어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한 것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반동이었다.

또 코소보의 변화가 민주적 원칙에 따라 진행돼야 한다는 것은 모든 세계인의 바람이다.

그리고 민족간의 관용은 민족구성이 복잡한 발칸지역의 평화를 위해 첫번째 필요조건이다.

그런데 이 원칙들이 현실 속에서 병립할 수 있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랑부예에서 미국과 나토는 폭격의 위협으로 당사자들에게 세 가지 원칙을 강요했다.

정말 폭격을 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지 미처 걱정하지 못한 것은 위협이 통할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세르비아는 굴복하지 않았고 폭격이 시작됐다.

저항은 예상 외로 긴 시간을 끌었고, 그동안 코소보의 상황은 악화의 길을 치달았다.

민족간 관용의 조건은 철저하게 파괴됐고, 알바니아계 코소보인의 지도력도 민주적 - 평화적 그룹에서 호전적 - 독단적 그룹으로 넘어갔다.

자치권의 점진적 발전보다 무조건 즉각 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전쟁이 끝난 뒤의 상황은 모순투성이다.

애초에 코소보의 자치권을 침해하고 민족간 갈등을 촉발해 전쟁을 유발한 세르비아는 전쟁에 진 뒤 응징받을 입장이다.

그런데 이제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민족간 관용의 원칙 아래 자치주로 남겨놓자고 주장한다.

그러니 나토는 세르비아의 주장을 옹호하며 코소보인들을 억눌러야 할 판이다.

코소보를 바로 독립시켰다간 나토가 주권침해의 죄명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의 (正義)에 따라 '피값' 의 보상을 원하는 코소보인들이 만족할 리 없다.

나토는 그동안의 일에 관계없이 랑부예의 원칙을 지켜야 할 입장인데, 코소보인들은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코소보의 긴장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고 수만명 주둔군으로 치안유지가 어려울 지경이다.

아무리 좋은 원칙이라도 외세에 의해 주어질 때 오히려 부작용이 더 클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사례다.

일제의 질곡에서 벗어날 때 우리도 겪은 일이 아니던가.

민족해방과 민주주의는 참으로 큰 선물이었다.

그러나 해방이 곧 분단으로 이어지고 민주주의가 허울만 세워진 까닭이 우리가 못난 탓뿐이었을까. 내 손으로 이룬 것이라야 진정 내 재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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