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88.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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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제11장 조우

뜨거운 국그릇에서 닭다리를 건져내 소금 찍어 쟁반에 담아 주던 희숙은 짧은 순간이나마 세상에서 가장 대견스럽고 흐뭇한 풍경은 남편의 입으로 게걸스럽게 들어가는 음식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응석으로 앙탈을 부렸을 뿐인 의구심이 실제로 있었던 상황은 아니었을까 싶었다. 사내들이란 집만 나섰다 하면 동물적인 근성만 남아 여자를 탐한다지 않았던가. 봉환에게도 그런 상황이 닥쳤다면, 휩쓸리지 말란 법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젊은 아내의 얼굴을 본체만체하고 콧등을 쟁반에 박은 채 살점만 뜯고 있는 것도 저지른 외입질에 대한 쑥스러움 때문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박봉환을 직접 겨냥하지 않고 형부인 손씨를 보고 물었다.

"아파트를 빌려 자취생활했다면 밥은 누가 끓여 줬어요?" "그쪽 물가동향도 파악해 볼 겸 해서 우리가 나가서 장보기를 해 오기도 했지만, 조석을 끓여 대는 것은 태호의 수고가 많았지. 현지의 여자가 간혹 와서 거들기도 했지만서두. "

"현지 여자가 누군데요?" "그거? 아직 밝힐 단계가 아니지. " 희숙의 궁금증을 부채질할 근거가 다분한 대답을 해버린 손씨로서도 이유가 있었다. 중국 가서 스무닷새가 넘게 죽을 고생을 하고 돌아온 남정네들 쓰린 속내를 쓰다듬어주기도 전에 넘보기조차 못했던 외입질이나 하고 왔을까 속만 지르고 있는 처제의 얄미운 속셈이 마뜩하지 않았다.

맞불을 지른 까닭이 뒤틀린 심사에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희숙의 눈꼬리가 제비꼬리처럼 예리하게 가늘어졌다. 손씨는 옳다구나 해서 희숙이가 빤히 바라보는 면전에서 박봉환의 옆구리를 쿡 건드리며 해명은 이 사람의 몫이라는 기척까지 하고 말았다.

그러나 희숙과 손씨 사이에 순간적이긴 하지만 미묘하고 얄궂은 교감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던 봉환은 마냥 고개를 숙인 채 닭고기 살점이나 뜯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희숙은 봉환에겐 자제력을 발휘하면서 손씨를 역공했다.

"설마 형부가 앞장서진 않았겠죠?" "나? 내가 그런 일에 눈길을 돌렸다면 안면도 바닥이 발칵 뒤집힐걸. " 손씨의 대꾸가 채 먼지 묻기도 전에 편역을 들고 나선 것은 언니였다.

"너도 참 답답하다. 너네 형부가 여자 보기를 돌 보듯 해서 부처님 가운데토막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다는 것은 내보다 니가 더 잘 알 텐데, 왜 어거지로 덮어씌우냐? 노름방에서 화투장 뒤지는 일이라면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만, 여자관계라면 내가 보증한다. 이맘이때까지 살아 오는 동안 너네 형부 여자문제로 날 속 뒤집은 적은 앞으로는 몰라도 과거에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슬하에 피붙이는 두지 못했지만, 너네 형부 여자문제 한가지는 정말 깨끗하다 너?"

"그래 언니. 나도 그거 알어. " 희숙은 닭고기 알뜰하게 찢어서 턱밑으로 갖다 바치던 시중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봉환을 노려본다거나 정말이냐고 강다짐하고 들지는 않았다. 희숙의 싸늘한 낌새를 알아챈 언니가 이번에는 남편의 허벅지를 아프지는 않게 꼬집으면서 면박을 주었다.

"당신은 왜 평지풍파를 일으켜요? 제 봐요. 또 새파랗게 질렸잖아요. " 희숙의 손을 뒤집으려는 것인지 남편의 신중하지 못했던 언사를 면박주자는 것인지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참견이었다.

그러나 희숙은 두 사람의 알량한 속내를 흡사 짐작하고 있는 것처럼 태연하게 앉았다가 불쑥 내뱉은 한마디로 언니를 다시 제압해 버렸다.

"하긴 그래. 남자로 태어나서 하반신이 얼마나 부실했으면, 외국 가서 한 달 가까이 체류하면서 여자 한번 안아보지 못하고 돌아왔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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