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YS '정치사무실'은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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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영삼 (金泳三) 전 대통령의 사무실 마련 요청을 놓고 청와대나 행정자치부는 그의 정치재개 움직임에 대한 다수 국민의 곱지 않은 시각이나 정계에 미칠 파장 등을 고려해 보름이 넘도록 결정을 미루고 있는 것 같다.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은 전직대통령 또는 그 유족에 대해 사무실을 제공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비록 다른 전직대통령들과의 형평성이나 예산확보 문제 등이 따르고, 무엇보다 여론의 반발이 예상되는 형편이라 하더라도 법률에 따라 사무실을 제공하는 일 자체는 그다지 사리에 어긋나는 처사가 아니다.

정작 우리가 걱정하는 점은 1백평이든 몇십평이든 사무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용도에 있다.

가령 전직대통령이 서울 시내 사무실에서 외국대사들을 맞아 남북관계나 국제정세를 놓고 환담하고, 측근들과 장애인 복지대책에 기여할 방안을 논의한다면 누가 사무실 개설을 말리겠는가.

金전대통령측의 요청대로 장소가 광화문 부근이라면 정부부처 관리들이 오다가다 들러 현직 때의 국정경험과 고견을 얻어듣기에도 딱 좋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십중팔구 새 사무실이 이런 용도로 쓰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데 있다.

상도동 '안방정치' 이후 최근의 정치재개 선언, 민주산악회 재건 등 그의 일련의 언행으로 보아 사무실이 마련되면 필경 '정치사무실' 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심증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더구나 법률이 허용한 사무실 제공에는 당연히 국민의 세금이 투입되게 된다.

IMF 충격이 가시지 않은 마당이고 당장 수재민 지원 재원도 모자라는 판에 국민세금으로 마련된 사무실이 특정 정파의 모임장소로 활용된다면 납득할 국민이 있겠는가.

전직대통령에 대한 사무실 제공은 어디까지나 전직대통령으로서의 품위유지와 역할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다.

전직대통령의 정치활동을 지원하는 것은 법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

우리는 관련법에 따른 사무실 제공 자체를 시비할 생각은 없다.

전직 국가원수라는 지위와 역할에 걸맞은 활동공간으로 이용된다면 오히려 바람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직대통령이 계파든 지역이든 특정 정파의 구심점을 만들 요량으로 사무실을 요청했다면 스스로 철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사무실 요청을 접수한 정부나 여권도 이 문제 처리에 쓸데없는 꼼수를 쓰지 말아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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