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82.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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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제10장 대박

심호흡을 하였으나 뛰기 시작한 가슴이 진정되기는커녕 이번엔 다리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집을 비워 두었다는 것이 개구멍 서방을 두었다는 것보다 더 큰 배신감이 들었다.

이성적으로는 초조감에서 비롯되는 모든 수치스런 징후들을 진정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그냥 일어서고 말았다. 다방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시각에 문을 열어 둔 다방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어디 있든지 그날 밤 안으로 반드시 찾아내고 말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예상했던 대로 다방문은 잠겨 있었다. 십여분 동안이나 문을 두드리고 흔들어댔다.

드디어 참다 못한 기척이 들렸다. 다행히 변씨의 목소리를 알아챈 애숭이 레지가 매우 불쾌한 얼굴로 문을 열어 주었다.

레지는 변씨를 상대조차 하지 않으려 들었다. 불두덩과 젖꼭지만 겨우 가린 정도의 반라 차림으로 변씨를 일별하고 자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변씨는 전등을 켰다. 다방 안이 대낮같이 밝아졌다.

찻잔과 찢어진 과자봉지들을 거두지 않고 방치한 탁자와 제멋대로 놓여 있는 의자들이 시선에 들어왔다. 레지가 문을 꽝 소리 나게 닫고 들어간 방 앞에도 여러 켤레의 여자용 신발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그 모든 산만하고 지저분한 정경들이 자신을 비롯한 차순진의 삶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탁자 한 개를 걷어찼다. 탁자는 복장을 걷어채인 개처럼 소리를 질러 대며 부서졌다. 반라의 레지가 문을 열고 상반신을 내밀었다.

"아저씨 왜 그러세요? 언니 여기 없다고 했잖아요. " "여기 없으면 어디 갔어?"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언니가 나한테 보고하고 외박나가는 줄 알아요?" "너희 잡년들끼리는 모두 한통속인데 모른다는 게 말이나 돼? 이년 어딨어?"

"한통속이라도 보고 안하면 알게 뭐예요?" "시치미떼지 마러. 내가 누군데 거짓말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경찰서장이라 해도 모르면 모르는 거죠. " 곁에 있던 의자 한 개를 또 다시 박살내고 말았다. 상반신만 내민 채 대꾸하던 레지가 얼른 겉옷을 꿰입고 다방으로 나섰다.

그러나 변씨를 만류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변씨가 어떤 물건을 박살내고 있는지 비웃듯 아니면 변씨의 근력을 시험하듯 입 다문 채 지켜보고 있었다. 소리를 지른다거나 발악을 하지도 않았다. 아금받고 대담하기가 이를 데 없는 계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매섭고 몰인정한 태도가 변씨를 힘빠지게 만들었다. 변씨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조리대에서 수돗물 받는 소리가 들렸다. 물컵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레지가 주저하는 듯하더니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취기가 있는 변씨를 노려보았다. 물컵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마시는데,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레지가 물었다.

"무슨 일 내시려고 이러세요?" "일을 내다니? 내가 강도질이나 할까 봐서 그래? 강도였다면 벌써 홀딱 벗고 있던 너부터 해치웠지. 엽때까지 그냥 뒀을까?" "술 많이 드셨지요?" "소주 반 병밖에 안 마셨다. "

"이건 내일 와서 변상하실 거죠?" "내일 와서 변상할 것도 없지. " 변씨는 바지주머니를 더듬어 지폐를 꺼내들었다. 십오만원을 헤아려 탁자 위에 놓았다. 계집이 그 돈을 휙 거두어 헤아리는 시늉만 하면서 말했다.

"저기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는 길 끝에 있는 명성모텔 아세요? 거기 가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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