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대우 꼬이게한 '가벼운 입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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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 29일 금융감독원 17층 회의실에선 오갑수 (吳甲洙) 부원장보가 진땀을 빼야 했다.

주한외국인은행협회 켈러허 회장이 한국신문에 난 기사들을 스크랩해 와 조목조목 의미를 따져 물었기 때문이었다.

켈러허 회장이 들고 온 기사들은 이헌재 (李憲宰) 금감위원장의 발언에 관한 것들이었다.

"대우의 해외부채는 대우가 현지에서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 "신규지원금 4조원은 해외부채를 갚는 데 쓰지 못하도록 하겠다" 는 등 지난 19일 李위원장이 대우 처리방안을 발표하면서 했던 말들이었다.

켈러허 회장은 李위원장의 이런 말들이 정부나 대우가 해외부채는 나몰라라 하려는 뜻이 아니냐는 의문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의심을 풀려면 정부가 직접 나서야 한다는 요구도 곁들여졌다.

물론 李위원장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잠자코 있을 외국은행들은 아니겠지만 그런 발언이 28일 외국은행들이 모여 집단적으로 자기네 목소리를 내자고 의기투합하게 한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금감위의 김영재 (金暎才) 대변인도 마찬가지다. 지난 27일 李위원장과 채권단의 회의 후 브리핑을 통해 金대변인은 "대우의 입장이 참고는 되겠지만 대우가 주도적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시기는 지났다. 채권단이 중심이 될 것" 이라고 말했다.

이는 듣기에 따라선 채권단이 대우그룹을 접수해 강제로 계열분리나 매각에 나설 것이란 얘기로도 해석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당장 대우 임직원들이 극력 반발하고 나섰다. 다음달 11일까지 대우 구조조정 계획을 만들어야 하는 채권단 입장에선 대우측의 도움이 절실한데 금감위 대변인이 채권단을 마치 '점령군' 인 것처럼 발언해 일만 꼬이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채권단 전담팀의 구성이 늦춰지는 등 물의를 빚자 30일 금감위는 "채권단 전담팀은 대우그룹과 협의하에 세부 일정계획을 짜고 계획의 이행은 대우그룹이 책임지고 진행할 것" 이라며 슬그머니 발을 뺐다.

요즘 금융시장은 살얼음판을 걷는 형국이다. 이럴 때 당국자의 신중치 못한 말 한마디는 자칫 판을 깨버릴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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