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 달리 후진국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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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빚지는 것도 실력이요, 기술임을 당당하게 자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빚 많은 기업들은 여지없이 퍽퍽 쓰러져 왔다.

드디어 대우도 손을 드는 상황에 이른 것 같다. 대우가 어떤 기업인가. 얼마나 대단한 기업인가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엄청난 빚 규모가 입증해 준다.

어렵게 되었으니 이 난리지, 다른쪽으로 생각하면 대우나 되니까 그 많은 돈을 끌어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찌 됐든 버티다 버티다 도저히 더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당사자인 대우만이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돈을 빌려준 채권은행들이나, 특히 한국 정부로서도 얼마나 고민했겠는가. 대우가 손을 드는 경우 경제적 충격도 충격이려니와 국제적 망신살은 또 어찌 하는가 말이다.

기업으로서의 대우문제만이 아니다. '천하의 김우중 (金宇中) 회장' 은 또 어쩔 것인가. 뭐니뭐니 해도 한국기업인으로서 그만큼 국제적으로 유명한 인물은 없었다.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살다시피 했고 특유의 수완으로 많은 사람들을 수없이 놀라게 만들었다. 지금도 그는 순간적으로 원가계산을 해내고 크고 작은 베팅을 몸소 해치운다. 회장이요, 구조조정본부장이요, 경리부장까지 겸해왔던 그다.

김우중 없는 대우란 상상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새 정부도 金회장을 높이 평가했었다. 전경련 회장으로서 "경제가 어려운데 대기업이 정리해고에 앞장서면 어떻게 하느냐" 고 했을 때 "역시 재계지도자다운 태도" 라고 치켜세웠었다.

또다른 한편에선 "경제야 기본이고 정치도 잘 아는 통 큰 기업인" 이라고도 했었다. 사실 그의 실패를 예상하기에는 지금까지 너무도 많은 성공담을 만들어왔다. 특히 그는 부실기업 살리기의 명수였다. 어떠한 적자기업도 그의 손만 닿으면 흑자기업으로 변하는 마술사였다.

IMF사태가 터졌을 때도 유독 金회장 혼자 큰소리를 쳤고 많은 사람들이 "역시 金회장이구나" 하고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외국에선 국내에서보다 훨씬 빨리 대우와 金회장에 대해 차가운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었다.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도 金회장이 옛날식 그대로를 답습하려 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특히 구조조정의 진행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러한 태도를 더욱 굳혀갔다.

국내에서도 그런 걸 느꼈었지만 4개월 전 일본에 와 보니 훨씬 심했다.

'세계를 상대로' 를 표방해 온 마당에 다름아닌 세계가 대우의 목줄을 더욱 야멸차게 조여들고 있으니 정말 큰일 아닌가.

결과론이지만 만약 대우가 국제적 존재가 아니었다면 이처럼 심하게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조선이건 자동차건 한국의 대우가 잘못되길 원하는 경쟁자들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너무도 간과했다. 찬물 떠놓고 대우 망하길 기도한 기업도 있었을는지 모른다.

급기야 대우 명함만 내놓아도 돈줄이 막혀들고 잘 팔리던 물건도 안팔리기 시작했다. 때로는 한국정부가 나서서 스스로 한국 기업을 죽여주는 경우도 숱했다. 외국 경쟁자로선 공짜 부전승 (不戰勝) 이 속출했다.

최근 얼마동안은 더욱 가관이었다. '대우조선을 일본의 미쓰비시가 인수키로 했다' '삼성차를 닛산이 인수한다' '대우차는 미국GM이 받기로 했다'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왔다. 거명되는 해당 외국기업들은 알지도 못한 채 어리둥절해했다. 떡줄 사람한테 물어보지 않고 김칫국 마시기만 계속하는 꼴이었다.

이런 식으로 하면 한국 기업의 신용도는 더욱 추락하고 따라서 국제시장가격 역시 갈수록 더 떨어진다는 지극히 평범한 상식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말이다.

한국기업들의 경쟁자들은 굳이 정보를 얻으려 뛰어다닐 필요가 전혀 없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총알이 떨어졌는지, 탱크가 고장났는지, 적진 (敵陣) 의 동정을 죄다 알 수 있으니 말이다.

때로는 제발로 찾아와서 속내를 다 드러내고 떼를 쓰질 않나, 고위 정부당국자가 직접 공식석상에서 짝사랑을 고백하질 않나. 피도 눈물도 없는 세계적인 냉혈한들을 상대로 흥정을 벌여야 하는 마당에 어쩌자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들은 여전히 한국을 깔본다. "정부든 기업이든 왜 당신은 조금도 변한 게 없느냐" 는 반문이다. 잘 나간다 싶으면 이내 큰소리치다가 바닥이 들통나면 그제야 도와달라 살려달라 떼를 쓰는 것은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세대가 바뀌어도 마찬가지 아니냐는 것이다. 달리 후진국인가.

이장규 일본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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