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78.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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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제10장 대박

아프다는 승희는 멀쩡했지만, 한동안 술을 끊다시피했다는 변씨는 대낮인데도 고주망태가 되어 있었다. 주문진에서 고흥에 당도한 이래로 끼니를 술로 떼우다시피하고 있었다. 술이 아니면 끓어오르는 마음속의 번뇌를 삭이기 어렵다는 속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걸핏하면 형식을 꿇어 앉히고 일장훈계를 늘어놓아 애꿎은 형식이가 싸잡이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다루기 만만한 자식이나 불러 앉히고 뒤틀린 심사를 가다듬어 보자는 몸부림 같기도 했다.

그러나 한씨네 일행 중에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가정파탄이나 결손가정의 기구한 상처와 후유증을 앓고 있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저마다 가슴 속에 묻힌 동병상련이 있었기 때문에 만난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냉정하게 바라볼 때,가정에 대한 문제인 이상, 떳떳하거나 생색낼 단초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형식이도 부모가 저지른 파탄 때문에 학업을 계속해야 할 젊은 나이에 타관생활로 전전하는 질곡을 겪고 있었다.

성품이 원만하고 심성도 느긋해서 말은 않고 있었지만, 형식이도 때로는 자신의 처지를 고민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형님. 형식이 그만 닦달하세요. 승희한테 하소연하더랍니다. 절간에라도 들어가야 살것 같다고 얼마나 시달렸으면 그런 말까지 했겠습니까. " "뭐 절간에 들어가? 산전수전 다 겪은 줄 알았더니 늙바탕에 와선 자식새끼 키워서 절간에 시주하는 일까지 보고 죽으란 얘기까지 들리네. "

"나라도 아버지가 그토록 주책바가지로 굴면, 세상 등져 버리고 싶겠지요. " "그 자식 음흉한 놈이야. 지가 절간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말은 공연한 흰소리여. 살아봤자 밥만 죽이는 허수아비 꼴인 나보고 들어가란 악담이겠지. "

"곡해하지 마세요. 속세에서 밥만 죽이는 늙은이였다는 것을 알면, 자비 (慈悲) 로 버티는 절간마저 퇴짜를 놓을 거예요. 올데갈데 없어지면 어쩔려고 술로 세월을 보내요?"

"시방 몰라서 또 쓸개를 뒤집나? 차라리 막막한 절벽이었으면 좋겠네. 희망이고 좆이고 그게 말짱 없어지면 차라리 헤치고 나갈 구멍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가 많았어. 오히려 사람 미치게 만드는 것은 실낱 같은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여. 실낱 같은 희망 때문에 거기에 내 모든 승부를 걸고 도박을 하다가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할 실패를 당한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나?"

"뭘 실패했다고 이러시죠? 차마담이 일이라도 저질렀나요?" 변씨는 씁쓰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철규가 그녀를 만났으리라는 것은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개구멍서방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말았다는 것도 확신이었다. 포구에 있는 묵호댁까지 알고 있는 사실을 한철규가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한 가닥 희망을 걸고 그의 권유를 따라 고흥으로 내려오고 말았다.

한철규가 개입하는 자존심의 손상을 각오하면서도 그녀를 설복시켜 돌아오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돌아오면 못이기는 척하고 주문진으로 돌아가 시치미 뚝 떼고 살고 싶었다. 그녀를 설복시켜 회유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주위에는 한철규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한철규가 되묻고 있는 말투는 시도했던 회유가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었다. 고흥으로 내려와 있을 동안 형식에게 시름을 안기고 술로 끼니를 대신한 것도 알고 보면 모두가 가슴에 도사린 조바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속으로는 철부지와 다를 것이 없다는 수치심이 들었으나, 도대체 맑은 정신으로는 초조감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혹시 한밤중에 전화벨 소리라도 들리면, 소스라쳐 벌떡 일어나게 되었고, 그 이후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혼자 나가서 소주를 사다가 홀짝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은 어둠 속으로 잠적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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