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64.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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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10장 대박

"신혼시절인데, 남편하고 같이라면 모를까 나하고 같이라면 거북할 텐데…. " "거북할 것 없어요. 한선생님도 우리 봉환씨가 고아출신이란거 알고 계시죠? 친척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아내 볼 수 없는 봉환씨를 내조해줄 사람이 이 하늘 아래에선 나밖엔 없다는 것도 알고 계시죠? 먹고 살겠다고 벌거벗은 채로 발버둥치고 있는 사람을 빤히 바라보면서 신혼시절이라고 달력에 가께만 치면서 죽치고 앉아 있어야 하겠어요?"

"결심을 했더라도 다시 한번 언니를 만나서 동행해도 좋은건지 결정을 내립시다. " "우리 봉환씨한테 겁먹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그런 일은 없었지요. " "그토록 부담이 되신다면, 언니 만나서 확답을 듣고 떠나지요, 뭐. " 그녀의 재가를 받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중국에서 걸려온 전화를 접수한 이후로 마음은 다급했었지만, 서울 나들이는 가게 때문에 엄두를 못내고 안절부절이었던 서문식당 안주인은 만의하나 말썽 생길 건덕지가 있을 수 없다며 한철규와 희숙을 싸잡아 부추겼다.

희숙보다 그녀가 먼저 흥분해서 상기하였던 것은, 서울의 시장 나들이가 발등에 떨어진 불똥이기도 했었지만, 잠시 동안만이라도 희숙으로부터 성가심을 받지않게 되었다는 것도 속 시원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깊은 속내는 드러냄이 없이 걸핏하면 만만한 말꼬리를 비틀어 물고 늘어지는 표독스런 앙탈도 삭히기가 어려웠고, 중국간 사람들이 귀국이 지연되고 있는 것조차 언니와 형부의 불찰로 쏘아붙이는 생트집과 포악은 정녕 그녀를 인내의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있었다.

목구멍에서 주먹이 튀어나오려는 폭력의 욕구를 헤아릴 수 없이 삼키고 삼켜온 나머지 목젖조차 부어오른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욕구 불만은 이웃사람들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희숙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곤 하였다.

희숙이가 알고 있는 자신의 치부만 없었다면, 비난 이상으로 희숙을 혹독하게 매도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앞뒤의 사정을 견줘볼 것도 없이 손찌검으로 해결될 일이었다면, 희숙의 낯짝은 애저녁부터 가차없이 피멍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란 상상으로 된시름을 그럭저럭 억눌러오고 있는 터였다.

차라리 동기간 아닌 남남지간이었다면 앙금이 앉을 겨를도 없이 진작부터 등지고 사는 사이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혈육이란 개꼬리에 묻은 똥처럼 수치스럽더라도 어쩔 수 없이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운명적인 흡인력을 갖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털어내려고 고개를 내밀고 돌아서면 돌아설수록 꼬리는 저만큼 제자리로 멀어져 있듯, 의지의 한계선 밖에 존재하는 촉수엄금의 불가사의였다. 희숙이가 떠나기 전 그녀는 한철규를 몰래 뒤곁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병원출입까지 했을 정도로 심경이 매우 불안정하고 변덕이 죽 끓듯하는 여자니까, 서울 가서도 절대로 혼자 두어서는 안된다는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백사장 포구까지 데려다 달라는 당부까지 잊지 않았다. 만의 하나 희숙의 마음이 바뀔 수도 있을까 두려워 떠나는 버스의 차창까지 두드려가며 잘 다녀오라고 분수에 넘치는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녀가 떠나려는 버스의 차창 틈새로 디밀어준 여비는 십만원이었다. 근래에 보기 드물었던 선심이었다. 희숙은 차창 저쪽에서 손을 흔들며 멀어져가고 있는 언니의 수척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죽거렸다.

"알 수 없는 여자야, 정말. " 무엇이냐고 묻지는 않고 고개만 돌리는 한철규에게 그녀는 덧붙였다. "여비하라고 주는 돈이 십만원이에요. 여태까지 이런 선심은 쓴 적이 없었거든요. "

"서울 볼일을 허술하게 여기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겠지요. " "아니예요. 나를 며칠동안이라도 안보는 게 속시원해서 준 돈이에요. 난 알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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