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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예의지국의 부끄러운 ‘폭력 국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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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문명의 충돌』의 저자인 새뮤얼 헌팅턴과 주 덴마크 미국대사를 지낸 워런 맨셀이 만든 외교전문저널 ‘포린 폴리시’는 한국을 주로 북한, 안보문제 차원에서 다루어 왔다. 그러나 올가을 인터넷판에서는 국회가 새로운 키워드로 떠올랐다. “여당인 한나라당과 야당 사이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온몸을 사용하는 스포츠”이며 국회는 민의의 전당이 아니라 해머·전기톱·소화기가 동원되는 피로 얼룩진 전쟁터라는 것이다. 전 세계 폭력의회 ‘톱 5’로 지목될 지경이다. 한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자존심이 모두 무색해진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는 동안 조 윌슨 하원의원이 “당신 거짓말을 하고 있어”라고 고함을 치는 사건이 일어나자 미 언론은 의회 폭력 문제를 조명하고 있다. 미 의회는 삼권분립을 시작하면서부터 의원들의 의회 예절을 중시해왔다. 1801년에 제정된 토머스 제퍼슨의 의회 매뉴얼은 상원의 예의범절을 명시했고, 100여 년 뒤인 1909년부터 하원도 의회 매뉴얼을 만들었다. 대통령에 대한 비웃음, 조롱, 인신공격을 금하고 본회의에서의 부적절한 언어 사용, 동료의원에 대한 공격 등 무질서한 행위를 하면 징계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정당들도 무례를 범해 견책을 받은 의원은 향후 상임위원회나 소위원회 위원장을 맡을 수 없도록 당규로 제한했다. 하원에 새로 들어오는 의원, 보좌관, 직원은 예외 없이 당선 또는 임명일로부터 60일 이내에 반드시 윤리교육을 받아야만 한다. 이들이 숙지해야 할 윤리지침은 무려 456쪽에 달한다.

영국에서도 의장의 권위 훼손, 하원규칙 위반, 고의적 의사진행 방해는 직무정지의 사유가 된다. 직무정지 기간 동안에는 세비를 받을 수 없다. 프랑스에서도 공개회의에서 폭력을 행사하거나 대통령, 총리, 각료, 의원이나 헌법에서 규정한 집회를 모욕·선동·위협한 경우 자격정지를 포함한 견책 또는 등원 금지가 명령된다. 징계 수위에 따라 의원수당을 감액할 수 있으며, 폭력행위를 검찰에 고발할 수도 있다.

물론 우리나라 국회법도 회의장의 질서 문란, 타인에 대한 모욕, 폭력 행사, 소란 행위, 회의진행에 방해되는 물건의 회의장 반입을 금지하고 있다. 또 형법 제138조는 국회의 심의 방해, 모욕, 소동을 일으킨 사람은 징역이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법은 법일 뿐 법을 만드는 의원들은 그 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 단 한 명의 국회의원도 국회나 지역민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에 대해 공개 사과한 것을 듣지 못했다.

우리가 폭력 국회의 오명을 벗기 위해서는 의원에서 직원에 이르기까지 강도 높은 윤리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언어·물리적 폭력을 행사한 의원은 세비 지급 중단, 국회 내 보직 제한, 각종 선거 후보 출마 제한 등의 실질적인 피해를 보도록 해야 한다. 국민들도 폭력 행위를 한 정치인이 국회나 행정부에 발붙일 수 없도록 유권자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폭력 국회’라는 부끄러운 네 글자를 지울 수 있다.

김정원 세종대 석좌교수·전 외교부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