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모래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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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인간이 딛고 사는 든든한 땅은 인간의 존재를 지탱하는 근거로 인식된다.

그래서 '땅이 꺼지는 듯한' 절망감이라면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위기를 비유하는 표현이 된다.

땅은 또한 '움직이지 않는 재산 (不動産)' 으로서 소유제도가 있는 인간사회의 가장 원초적인 소유대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땅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공포의 하나인 지진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는 특히 안전지대에 속하는 곳이므로 제쳐놓아도 좋겠다.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땅의 변화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의 움직임에 의한 것이다.

해안의 모래밭은 이 변화를 뚜렷이 살필 수 있는 곳이다.

폭풍이 닥쳐오면 바닷가의 모래는 거센 물결에 쓸려 바닷속으로 흘러내려간다.

폭풍이 클 때는 백사장 뒤의 모래언덕까지 깎여 나간다.

흘러내려간 모래는 바닷속에 수중보 (水中洑) 와 같은 모래언덕을 만들어 파도를 약하게 만들어준다.

폭풍이 그치고 바다가 잠잠해지면 잔잔한 물결이 물속의 모래를 서서히 해변으로 돌려 보내준다.

바닷바람은 모래의 일부를 모래언덕까지 올려보내기도 한다.

큰 폭풍을 주기 (週期) 로 모래는 이렇게 바닷속과 모래언덕 사이를 순환하는 것이다.

농업시대 사람들은 백사장에 붙여 집을 짓지 않았다.

'땅이 꺼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산업화 이후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토목건축기술의 발달로 전보다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있게 됐고, 경치좋은 곳에 집을 짓는 것이 경제적 이득으로 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따금 큰 폭풍이 닥치면 해안에 가까이 지은 집들이 피해를 보았고, 그런 피해를 없애기 위해 사람들은 튼튼한 방벽을 쌓기 시작했다.

웬만큼 피서객이 몰리는 해수욕장에 가 보면 콘크리트방벽을 쌓지 않은 곳이 별로 없다.

방벽 위의 상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방벽은 모래의 자연스러운 순환을 가로막는다.

모래의 저축을 맡는 모래언덕이 방벽과 상가에 뒤덮여 모래밭으로부터 단절돼 있으니 폭풍이 닥칠 때 수중보의 형성이 안되고 모래가 쉽게 쓸려나간다.

바다가 잠잠해져도 모래가 해변으로 충분히 돌아오지 못한다.

어릴 때 갔던 대천해수욕장. 그 드넓은 모래밭의 기억이 감상 (感傷) 으로 부풀려진 것만은 아니었다.

한적한 해변을 일류 해수욕장으로 키우기 위해 방벽을 쌓는 공사는 지금도 여기저기서 진행되고 있다.

백사장이 다 씻겨내려가고 나면 방벽 위에서 피서를 즐기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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