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차관급회담 무산 속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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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1일 북한측의 일방적인 회담연기로 남북차관급 회담의 앞날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우리 회담 관계자들은 비료지원 문제만 해결되면 곧 회담이 열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북한측은 공식적인 회담연기 이유로 우리측이 비료지원 약속을 제때 이행하지 않은 점을 들고 있다.

"예정대로 20일 대표단을 베이징 (北京)에 파견했으나 회담시간까지 비료 2만2천t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 이란 주장이다.

우리측 고위관계자는 "날씨관계로 비료 선적이나 수송에 지연이 있었던 점을 물고 늘어져 회담의 기선 (機先) 을 제압하려는 의도" 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북한측이 심술을 부린 이유가 비료 때문만은 아니라는 게 회담관계자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정부는 이미 지난 19일 날씨 때문에 선적.수송이 지연된 삼선아폴로호의 사정을 북한측에 알렸고 구체적 출항계획과 북한해역 도착시간까지 전달했다.

따라서 누구보다 관심을 갖고 운항사정을 잘 알고 있을 북한이 이를 문제삼은 것부터가 뭔가 다른 노림수가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갖게 한다.

베이징의 외교소식통은 23일부터 이곳에서 열리는 북.미고위급회담을 주시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북한이 남북대화는 북.미대화의 종속 변수라는 기존 전략.입장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려 할 것" 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남북회담과 북.미대화라는 '두마리 토끼' 를 쫓기가 버거운 상태에서 일단 미국과의 대화에 주력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란 분석이다.

우리 정부가 주목하는 대목은 서해 교전사태가 회담 연기에 미친 영향이다.

북한측이 불쾌한 감정을 회담연기라는 방법으로 드러내 보였을 가능성이다.

이와 함께 이산가족 문제 등 부담스런 현안 논의를 앞두고 다소 숨고르기가 필요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또 북측이 우리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한 비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회담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이번 사태로 누구보다 정부가 곤혹스런 입장에 처하게 됐다.

햇볕정책을 통해 북한을 대화의 장 (場) 으로 끌어냈다고 자신하던 정부가 북한측에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다.

비료 20만t중 절반 가까이가 이미 북한에 건네진 상태다.

북한측도 적지않은 부담을 각오해야 한다.

당국회담에 선뜻 나서지 않고 혼선을 초래하는 데 대한 시선이 곱지않기 때문이다.

이런 분석 속에서도 우리 대표단은 차관급회담이 수일내 재개될 가능성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무엇보다 북한측이 회담의 파기가 아니라 연기를 밝힌 만큼 대화의 여지는 상당히 남아 있다는 게 우리 당국자들의 판단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남북한 당국사이의 신뢰에 상당히 깊은 상처를 남길 것으로 전망된다.

당초 합의대로 이산가족 문제를 논의하기는커녕 인도적 차원에서 준 비료 중 일부 물량이 지연된 점을 빌미로 회담 개최까지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회담 관계자는 "차관급회담이 다시 열린다 해도 양측이 이산가족 문제와 상호 관심사를 실질적으로 논의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것" 이라고 말했다.

베이징 =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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