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급해진 여권] '민심 이럴줄 몰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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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조폐공사 파업 유도 의혹 사건' 에 접한 여권의 표정은 '심각' 바로 그것이다.

'옷 로비 의혹 사건' 과 관련한 여론의 포화에 끄떡도 않던 오만함은 찾기 어렵다.

법무부장관을 즉각 자르고 야당이 주장한 국정조사권 발동을 수용했다.

여권은 이를 정면돌파라고 이름하지만 다급함을 감추려는 데 지나지 않는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9일 국민회의 김영배 (金令培) 총재권한대행을 청와대로 불러 국정조사권 발동을 수용하라고 지시했을 때의 표정은 단호하고 결연했다고 한다.

8일 김중권 (金重權) 청와대 비서실장이 "재조사 등 추가조치는 없다" 고 발표했던 것과 전혀 다른 상황 전개다.

'옷 사건' 으로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진 민심에 노동계가 당사자가 되는 '파업 유도' 가 겹쳐 상승작용을 일으킨 만큼 김태정 (金泰政) 법무부장관의 해임으로 쉽사리 가라앉기는 어려우리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옷 사건의 뇌관이 제거됐다지만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노동계.시민단체에 대한 대응에 차질이 빚어질 경우 민심이반 고착은 물론 정권의 도덕성이 치명상을 입게 된다는 위기감이 여권내에 팽배해 있다.

소수정권으로서 지지기반인 노동계.시민단체와 갈등을 빚는 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것은 너무나 확연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동교동계 핵심인 한화갑 (韓和甲) 총재특보단장은 8일 저녁 청와대로 金대통령을 방문, 국정조사권 수용을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옷 사건 이후 고뇌를 거듭해 온 金대통령은 이미 金장관 경질결정 이전부터 '정정당당한 대응' 을 결심했다는 게 청와대 핵심 관계자의 뒤늦은 설명이다.

金대행도 이날 청와대를 다녀온 뒤 "金대통령은 조폐공사 파업 유도 의혹 사건이 터지지 않았더라도 멀지않은 시기에 金장관을 물러나게 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고 전했다.

여권은 국정조사가 정국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각오하는 듯하다.

야당의 무차별 공세가 이어지고, 전혀 예기치 못한 새로운 의혹이 불거져 사태를 악화시킬 소지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달리 어떤 방도가 없는 상황이므로 정면 대처가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청와대 관계자는 "국정조사에서는 원칙에 따라 한점 의혹을 남기지 않을 것이며 새롭게 문제가 되는 인사가 있으면 모두 처벌하게 될 것" 이라고 예고했다.

이같은 결연함은 당에서도 확인된다.

金대행도 "문제가 생기면 도리 없는 것 아니냐" 고 말했다.

여권의 국정조사권 수용은 대야 관계의 복원도 염두에 둔 것으로 알려진다.

국회가 가동되면 한나라당도 정치개혁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는 게 여권의 기대다.

뒤늦게 사태수습에 나선 여권이 상황타개를 위해 동원할 갖가지 수와 수순은 정국을 뜨겁게 달굴 것으로 예상된다.

이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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