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남북회담 또 서두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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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고관 옷 로비 의혹 사건' 으로 나라 전체가 시끄럽던 지난 2일 통일부는 큰 뉴스가 있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베이징회담이 한창 진통을 겪던 이날 오전 통일부는 막후 접촉을 벌이고 있는 남북협상 대표의 명단까지 공개하며 "오후 2시 공식발표하겠다" 고 밝혔다.

그러나 협상이 뜻대로 되지 않자 "오늘 중 어렵겠다" 며 기자회견을 취소했다.

임동원 (林東源) 통일부장관은 북한측이 한국측의 비공개 약속 위약에 화를 냈기 때문이라며 언론에 책임을 떠넘기기도 했다.

합의서에 서명하기까지는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게 북한과의 협상임에도 며칠 전부터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며칠 내로 남북관계에 좋은 조짐이 있을 것" 이라며 부추긴 사실은 일절 무시하면서.

林장관은 이후 공보관을 통해 "오후 9시 뉴스 생중계를 준비해 달라" 고 방송사에 요청했다가 "오늘 타결이 어려우니 철수해 달라" 고 번복하는 등 뭐가 급한지 마냥 서둘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날 고관 옷 로비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결과 발표와 다음날 (3일) 로 예정된 서울.인천에서의 국회의원 재선거를 떠올렸다.

지난 95년 6.27 지방선거 하루 전 정부가 쌀 15만t을 북한에 서둘러 보냈다가 낭패를 당한 경험을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전 국민적 관심사가 된 옷 로비 사건이 베이징 회담으로 묻히지도 않겠지만 어쨌든 대북문제를 또다시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남북 차관급회담 재개를 위해 베이징에서 3일까지 이뤄진 막후 접촉은 이렇듯 정부의 대북 접근방식에 도사린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문제는 이뿐 아니다.

비료 20만t (6백억원 상당) 의 지원에다 매년 비슷한 양을 계속 주겠다고 북한에 약속하고도 정부 당국자들은 "95년 이후 북한에 지원했던 양과 비슷한 것" 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들이다.

"북한 문제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고 서둘렀던 노력은 번번이 실패했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갔다" 는 한 북한 전문가의 말을 정부는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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