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아니면 '아니오' 해야지 (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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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5) 1시간만의 이별

"저 노파가 진짜 내 여동생이란 말인가?" 가까이서 얼굴을 살펴 보니 주름이 가득했다. 일단 방으로 안내한 뒤 우선 내 여동생이 맞는지부터 확인해 봐야 했다.

'어디서 살고 있느냐' 는 질문에 '현재는 평양 외곽 순천에서 작은 아들과 같이 살고 있고 큰 아들은 평양시내에 산다' 고 말했다.

옆에 따라 온 젊은이가 바로 작은 아들이라며 인사를 시켰다.

30대 중반쯤 돼 보였다.

나는 고향 창성과 일가 친척들의 근황을 물어 봤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월남하기 전, 그러니까 45년 이전의 일들은 어렴풋이나마 기억하는듯 했지만 그후에 대해서는 전혀 깜깜이었다.

'그럴 수도 있으려니…' 하면서도 내심으론 몹시 답답했다. 불현듯 한 가지 짚히는 게 있었다.

어릴 적 밭에 가서 영숙이와 같이 나눠 먹었던 바로 그 오이가 생각난 것이다.

"그렇지, 나와 영숙이가 더불어 기억할 수 있는 공통의 소재라면 그것 말고 다른 게 없겠지. " 나는 "어렸을 때 혹시 오이 먹던 생각 나느냐" 고 물어 봤다.

그녀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오라버니도 그 오이를 기억하는군요!" 하며 왈칵 울음을 터뜨리는 게 아닌가.

직감적으로 '영숙이가 틀림없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그렇지…영숙이가 맞아…. "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이내 구슬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영숙이의 두 손을 꼭 잡은채 아련한 어린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내가 보통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던가.

하루는 어머니를 찾느라 집 뒤에 있는 목화밭엘 갔었다.

가까이 가 보니 영숙이가 손에 큼지막한 오이 하나를 들고 있었다.

"나도 좀 먹자" 고 했더니 영숙이는 오이를 뚝 잘라서 내게 주었다.

가만히 보니 달고 맛있는 부분은 나를 주고 자기는 쓰디 쓴 오이꼭지를 씹어먹는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오빠를 대하는 영숙이의 태도가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었다.

그후 난 영숙이를 생각할 때마다 그 오이를 떠올리곤 했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 없이 부둥켜 안고 한참을 울었다.

바로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 보던 조카도 고개를 돌리더니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든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어디서 인기척이 나자 누이동생은 갑자기 목청을 높이더니 "오라버니, 우리는 위대한 수령 밑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하며 딴 소리를 해 대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주변에서 누군가가 듣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으리라. 40여년만의 만남은 길지 않았다.

한 시간 남짓만에 동생과 헤어진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세웠다.

내게 평양에서의 마지막 밤은 재회 - 눈물 - 이별로 이어지는 한 편의 비극과도 같았다.

그날 밤은 임동원 (현통일부장관) 대표에게도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평북 위원이 고향인 그는 처음 '누이동생을 만나게 해 주겠다' 는 북한측 제의에 완강한 거부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그는 "약속위반이다. 만나지 않겠다" 며 계속 버티다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결국은 만나고 말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역시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누이동생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여동생이 소학교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임 대표의 아버지가 누이동생에게 "학교에서 일본 선생님이 네 생일을 물어 보시면 '주 갓스 도오카 데스' (10월10일입니다) 라고 대답해라" 고 가르쳐 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이동생은 예행연습 때마다 "주 갓스 도깨비 데스" 라고 대답해서 온 식구가 배꼽을 잡고 웃은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뜻밖에 이뤄진 40여년만의 이산가족 상봉에는 이처럼 웃지못할 사연들도 많았다.

그후 나는 성당에 갈 때마다 영숙이에 대한 기도를 잊지않고 있다.

글= 강영훈 전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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