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 과거를 청산하는 방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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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그릇된 과거를 비판하고 청산하는 일은 역사적 당위요, 책무지만 그 청산의 방법론에 이르면 누구도 정답을 제시하기 어렵다.

더구나 그 방법은 청산돼야 할 과거사의 내용, 그 사회의 문화전통, 청산할

세력과 청산당할 세력과의 역학관계, 그 사회의 경제적.사회적 안정성 등등에 의해 영향받기 때문에 어느 사회에나 통용되는 보편타당한 청산방법을 마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청산이 정의를 지향하는 것이라는 대 전제가 있는 한 그 청산의 방법을 마련하는 데 있어 몇가지 보편타당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첫째는 과거청산을 통해 확립하고자 하는 정의의 내용과 원칙이 분명히 제시돼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은 과거청산이란 이긴 자에 의한 복수나 감정풀이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둘째는 과거의 진실규명과 평가가 선행돼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청산해야 할 대상과 청산의 정도가 명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나온 평가와 그에 따른 청산방식을 그 사회구성원들에게 납득시켜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귀감이 될 만한 각국의 과거청산 방법을 분석해 보면 처음부터 의도했건 안했건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원칙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대표적인 보기의 하나가 남아프리카 넬슨 만델라의 과거청산 방식이다.

만델라 대통령은 집권 후 '진실과 화해위원회' 를 만들어 먼저 진실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비록 살인을 저질렀더라도 사면을 하는 과감한 화해와 용서의 과거청산 방식을 택했다.

진실이 드러나면 옳고 그름은 자연히 판가름날 수 있으며, 그를 통해 앞날을 위한 정의의 기준은 스스로 확립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국민들에게 "진실규명만이 과거를 편히 쉬게 할 수 있다" 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으며 그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만델라로 하여금 '진실과 화해위원회' 를 자신있게 가동할 수 있게 했다.

속전속결에 쾌도난마식으로 진행된 듯한 2차 세계대전 후의 프랑스 대숙청에도 비록 압축적이나마 정의의 기준과 과거에 대한 평가, 그리고 국민들의 강한 지지라는 세 요소가 녹아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드골은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줘야만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 는 분명한 기준을 제시했다.

이는 국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나치협력이 불의이고 반국가적 행위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따라서 그 과격하고 극단적인 과거청산도 큰 반발이나 혼란 없이 집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해방 후 친일에 관한 과거청산이 유야무야돼 이제까지도 역사적 부담과 수치가 돼 오고 있는 터에 새로운 과거청산마저 명확한 기준의 제시도 없고, 국민설득 과정도 없으며 학문적 평가마저 선행되지 않은 채 느닷없이 제기돼 혼란과 갈등을 빚어내고 있다.

박정희 (朴正熙) 전 대통령에 관한 평가는 여러 갈래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도 한 개인으로서 朴전대통령에 대해 얼마든지 나름대로의 견해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시민의 자격이라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화해의 의사를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金대통령은 엄연한 공인 (公人) 이다.

그것도 보통 공인이 아니라 대통령이며 정당의 총재다.

그런 사람이 과거나 전 대통령을 평가할 때는 그 내용이 비판적인 것이든, 화해에 관한 것이든 개인적인 견해표명처럼 자의적이고 자유로워서는 안될 것이고, 더구나 국민이 '느닷없다' 고 느끼게 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진실규명' 이란 과거청산 원칙에서 보면 우리의 최근세사는 아직도 어둠의 시대다.

朴대통령 시대 뿐 아니라 해방직후나 이승만 (李承晩) 대통령 시절마저도 의혹에 잠겨있는 상태다.

그런 마당에 일방적인 사면과 화해를, 그것도 느닷없이 개인적인 결단만으로 계속한다면 진실규명과 정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또 잇따른 일방적인 사면과 화해를 통해 현 정권의 정국 장악력은 강화된다고 치자.

그것은 金대통령이 권력을 획득하고 정국을 장악하는 그 자체에 만족하는 사람들에게는 박수를 받을는지는 모르나 그를 통해서 사회정의가 바로서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의 집권 전보다 더 큰 좌절감과 배신감을 안겨주게 될 것이다.

유상삼 중앙M&A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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