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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의 섣부른 ‘논문 검증’은 위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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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언제부터인가 학술논문의 표절을 비롯한 연구윤리 문제가 공직 후보자들의 도덕성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요건의 하나가 됐다. 이는 학자들의 공직 참여 폭이 그만큼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는 방증 같기도 하며, 우리나라 정치사회 발전의 일면을 보여주는 측면도 있어 긍정적으로 보인다.

문제는 학술활동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인해 왜곡된 방향으로 논란이 진행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왜곡된 논쟁은 일반 국민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해당분야 전문 지식인들의 사기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물론 논문의 저자 표시나 공로 배분의 공정성 시비가 연구내용의 위조·변조·표절 등을 포함하는 연구의 진실성 문제와 더불어 연구윤리의 중요한 핵심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학생의 학위논문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학술지 논문에 지도교수의 이름이 공동저자로 등재됐다고 하여 연구윤리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일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자연과학 연구수행의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지도교수의 역할 없이 연구논문이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우선 자연현상의 이해와 해답을 얻기 위한 이론적 가설을 세우는 어려운 일에서부터 시작해 이를 증명하기 위한 실험설계의 단계, 설계된 실험을 수행하는 단계, 그리고 실험 결과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단계 등을 거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지도교수의 학문적 경륜과 역할은 거의 결정적이다. 사실상 지도교수가 수행하는 연구과제의 일부를 학생이 참여해 도우면서 배우고 그 결과에 근거해 학위를 받는 과정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위논문에는 학생의 이름만 단독으로 표시하되, 학술지에 게재할 때에는 학생과 지도교수의 이름이 모두 등재되는 관행이 이미 서양을 비롯한 과학 선진국에서는 정착돼온 것이다.

다만 학생과 지도교수를 포함한 공동연구자들 가운에 누구를 ‘제1저자’로, 그리고 누구를 ‘교신저자’로 표시할 것인가 하는 소위 ‘공로 배분’의 문제는 더러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연구내용과 결과에 전혀 기여가 없는 사람이 공저자로 이름을 올리거나, 반대로 명백한 기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 표시에서 제외되는 일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당연히 부당한 저자 표시나 연구 부정행위 부분에 저촉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근대적 개념의 학문연구 활동의 역사가 서양에 비해 일천하기 때문에 연구윤리에 관한 대처가 미흡한 채 오늘에 이르렀음이 사실이다. ‘황우석 교수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정부는 정부대로 관련 지침을 제정한 바 있고, 관련 대학과 단체들도 각 기관의 입장에서 자율적으로 연구윤리 규정 등의 제도들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 앞으로 학술 연구윤리 문제는 정치권의 논의 대상이 되기 이전에 학계에서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정리되고 시시비비가 가려지는 면모를 스스로 갖추어 나가야 할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정치권대로 학문 분야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섣부른 판단에 근거해 학자들의 연구업적을 함부로 매도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학문발전과 정치발전 모두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채영복 전 과학기술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