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메이커의 편지] 5년 걸린 번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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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참으로 개인적인 내 질문에 어떤 감정의 노출도 없이 담담하게 "저 같은 사람이 철학과 주변에는 더러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던 한 철학도가 번역한 1천6백여 쪽 (원고지 1만2천장) 의 상.하 두 권의 책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가슴 저 밑바닥에서 무엇인가가 울컥 솟아올랐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풍우란 선생의 '중국철학사' 가 우리말로 완역되어 상재된 것은 번역을 시작한 지 5년 만이었다.

번역자는 그동안 대학원을 휴학하기도 하면서 2백여 권의 관계서적들을 검토하여 원서의 4백 여개 오류를 발견하는 절차탁마의 대장정을 마쳤다.

그 5년 동안 그에게 원고 독촉을 수없이 했고 막판에는 번역계약 해제 위기에 몰려 고통을 당했던 내가 유독 그 책을 보면서 처음으로 눈시울을 붉힌 까닭은 서른을 갓 넘어보이는 그가 나이를 묻는 내 질문에 마흔이라는 대답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었고 장남이지만 경제생활은 독자적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흔히 우리 범인들은 장부들의 인생에서 그들의 살신성인하는 조국과 민족과 사회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고 눈시울을 붉힌다.

그러나 인생의 황금기인 30대 후반이면 당연히 요구당할 수밖에 없는 안락과 아랫도리의 물질적, 신체적 욕망과 싸우면서 신산한해 (辛酸汗海) 의 작업을 한 그의 노고도 치하해서 마땅할 장부의 훌륭한 업적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삶의 흔적이다.

세세년년 청청한 오월은 올해도 무심히 지나가건만, 역풍이 불어오는 기미만 보여도 '개혁' 의 깃발은 스스로 뒤집어지면서 '革 (혁)' 자인지 '惡 (악)' 자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황사의 계절이다.

진정코 개혁이란 바로 '저 같은 사람' 이 장부가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일 것이다.

신지식과 실용이라는 여의봉이 기초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근본을 파괴하고 본질을 희롱하는 이 나라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박종만 까치글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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