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 '책임'이 안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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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고금의 명상 (名相) 으로 꼽히는 제갈량 (諸葛亮) 은 울면서 마속 (馬謖) 을 참한 것으로 유명한 가정 (街亭) 전투의 패배후 스스로 임금에게 벼슬을 내려달라고 상주한다.

책임을 져야겠다는 것이다.

임금은 전쟁의 승패란 늘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으나 제갈량의 뜻을 헤아린 한 신하가 "위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 법을 지키고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누가 복종하겠습니까" 고 간해 제갈량은 뜻대로 승상에서 우장군 (右將軍) 으로 강등된다.

삼국지에 있는 얘기다.

모든 공직자가 다 제갈량처럼 도덕성과 투철한 책임의식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러나 자기에게 잘못이 있으면 그에 상응한 처신을 해야 하고, 정부도 당연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래야 기강이 서고 조직이 살 수 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요즘에는 세상이 떠들썩한 문제가 터지고 누가 봐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실수가 나와도 스스로 책임지거나 책임을 묻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가까운 예로 유종근 (柳鍾根) 전북지사의 경우를 보자. 이른바 고관집 절도사건의 피해자인 柳지사에게 문제의 12만달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말대로 12만달러가 없었다고 해도 柳지사는 도둑맞은 3천5백만원의 출처.사택의 성격.현장검증거부 등으로 큰 파문과 물의를 빚었다.

대통령경제고문으로서 위로 대통령에게 누를 끼치고 지사로서 전북도민에게도 누를 끼쳤다.

이쯤 되면 그에 따른 책임감과 거취표명을 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명성높은 고위공직자가 아닌 보통사람에게도 그런 처신은 기대되는 것이다.

그러나 柳지사가 아직껏 자기 처신에 관해 무슨 의사표시를 했다는 말은 들리지 않고 있고, 그는 그후에도 외국출장을 갔다고 한다.

기이한 것은 청와대측 역시 그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 점이다.

여당에서는 "표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는 말까지 나오는데 柳지사는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때 오히려 칭찬을 들었다고 보도됐다.

이해찬 (李海瓚) 교육부장관의 경우도 밖에서 일반사람이 보기엔 이해하기 어렵다.

그의 교육개혁정책이 비록 훌륭하다고 해도 불과 보름 사이에 22만4천명이라는 놀라운 숫자의 교사들이 그의 퇴진을 바라는 서명을 했다면 그의 정책추진 방식에는 문제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상황이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거취표명을 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 李장관도 그런 표명을 했다는 소식이 없고, 역시 기이하게도 청와대측도 말이 없다.

이런 사례는 이밖에도 많다.

국민연금파동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없이 그냥 넘어갔고, 간첩선.미사일오발사건이나 검찰파동 같은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검찰은 3.30 재.보선의 여당특위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라는 지시를 받고 달포가 되도록 말이 없는데 누구도 이를 챙기는 것을 볼 수 없고, 국회에서 柳지사 사택 현장검증을 하겠다고 답변한 박상천 (朴相千) 법무장관도 현장검증을 못한데 대해 아무 말이 없다.

여당쪽도 마찬가지다.

국회에서 날치기나 변칙을 한 것은 일종의 일을 저지른 것인데 저질렀으면 누군가 미안하다, 송구하다고 해야 할텐데도 역시 말이 없다.

오히려 고위층한테서 수고했다는 치하의 말을 들었다던가.

이처럼 잘못이 있어도, 물의를 일으켜도 책임을 지지도 묻지도 않는다.

약속을 하고 지시를 받고도 책임있게 일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다들 그냥 넘어간다.

이런 공직사회로 나라꼴이 되겠는가.

과거엔 그래도 제스처일망정 일이 터지면 사표를 내는 사람도 더러 보였는데 이젠 공직자들의 얼굴이 더 두꺼워진 것일까. 이제라도 책임을 물을 일은 물어야 한다.

이 사람은 국민회의 사람이니까 안되고, 저건 자민련 몫이니까 안되고… 이런 식의 무책임, 내편 껴안기 행태가 정부안에 엿보이는 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과오나 실수를 그냥 덮을 경우 그 조직에서 그 사람의 영 (令) 이나 권위가 설리가 없고 일이 잘 될리가 없다.

일을 위해서도 책임정치.책임행정은 확립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개각도 할 필요가 있으면 그때 그때 하는 것이 좋다.

YS때 개각을 너무 자주 해 탈이었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과거 잦은 개각이 나쁜 평 (評) 을 받았다고 해서 필요가 있는데도 개각을 미룬다면 일보다는 '평' 을 더 의식한다는 평을 듣기 쉽다.

문제가 있으면 그때그때 책임을 물어야 기강이 서고 책임의식을 갖게 된다.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을 묻지 않는 것도 책임질 일이 된다.

송진혁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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