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정치개혁 하긴 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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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민회의.자민련의 8인 정치개혁특위가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마련해 발표한 선거제도 합의안이 불과 하루만에 뒤집힌 것은 공동여당의 미숙성과 함께 본말이 뒤바뀐 정치개혁 논의의 허상 (虛像) 이 여실히 드러난 사례로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여권의 정치개혁 논의가 내년 총선에서의 다수 의석 확보와 당 지도부 및 현역의원들의 기득권 유지를 염두에 둔 당략적 선거제도 짜내기에만 집중되는 현상을 진작부터 우려해 왔다.

그런 점에서 지난 6일 발표된 두 여당의 선거제도 합의안이 야당은 물론 학계.시민단체.언론들로부터 집중 비판받은 것은 여권의 자업자득이었다. 위헌 시비를 부른 비례대표 확보 50% 상한선 설정이나 지역구.비례대표 중복출마 허용 등은 누가 봐도 정치개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특히 정치개혁의 본질에 해당하는 정당민주화.저 (低) 비용 정치 방안.정치자금의 투명성 제고 등에 대해서는 논의도 하지 않고 정치인들의 관심사인 선거제도만 제시한 것은 한마디로 '잿밥에만 신경을 썼다' 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그런 합의안이 청와대와 공동여당 수뇌부의 이의제기에 이어 하루만에 뒤바뀌었으나 문제는 합의안 번복이 정치개혁을 위한 본질적인 조치들을 새로 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권내 반발과 대 (對) 야당 협상력 제고를 감안한 또다른 당략의 소산으로 여겨진다는 점에 있다.

지루한 의견조율 끝에 소선거구제로 합의됐다고 발표하고 다음날 "중선거구제 검토" 로 돌아섰으니 도대체 국민들을 언제까지 정치권 잿밥 흥정의 억지 관객으로 삼을 셈인가.

우리는 소.중선거구 여부를 떠나 이번 합의안 번복 사태 하나만 보아도 공동여당이 말하는 정치개혁의 기준이 무엇인지, 진정한 정치개혁 의지가 있기나 한지 의심받을 소지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선거제도와 같은 문제야말로 청와대와 두 여당간, 그리고 공동여당내 지도부.일반의원에 이르기까지 여권내에서도 광범한 의견수렴이 필요한 문제인데 이번에 보면 여권의 이런 의견수렴과 의사결정 시스템에도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공동여당이 이번주부터 새로운 선거제도 방안을 마련한다고 하지만 선거제도란 사안의 성격상 내년 총선이 임박해 여야간 협상으로 결말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여권에서는 이제서야 중앙.지구당의 축소 또는 지구당 폐지 문제를 포함한 저비용.고효율 정치를 위한 개선책들을 반영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상향식 공천방식 등 정당 민주화와 정치자금 투명화를 위한 조치가 정치개혁의 초석 (礎石) 이며, 당연히 선거제도 문제에 앞서 논의.결정하는 것이 순서라는 것을 강조한다.

여야 지도부만 결심하면 본질부터 해결하고 들어가는 정치개혁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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