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핵카드' 빼들었다…옐친, 전술핵개발 계획안 서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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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러시아가 지난달 29일 미국 및 나토에 대해 위협적인 경고사격을 가했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이날 열린 국가안보위원회 회의에서 전술핵을 보강한다는 계획안에 서명한 것이다.

최근 폴란드 등을 새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며 동진 (東進) 정책을 펴고 있는데다, 러시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고 공습을 멈추지 않고 있는 나토에 대해 '핵카드' 로 압박해보겠다는 뜻이다.

옐친이 직접 주재한 이날 회의는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총리, 이고르 세르게예프 국방장관 등 핵심관련자만 참석한 채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됐다.

옐친 대통령은 회의 직후 "러시아에서 핵전력이야말로 국가 안보와 군사력 확보를 위한 핵심적 요소" 라고 강조했다.

게다가 블라디미르 푸틴 안보위 서기는 러시아가 핵실험을 재개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그는 또 러시아는 자체뿐만 아니라 동맹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핵 억지력 실현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동맹국까지도 러시아의 핵우산에 포함시키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이에 대해 지난 93년 이후 러시아가 견지해온 '가상적을 설정하지 않는 방어적 개념' 의 군사 독트린 자체가 바뀐 것인가에 대해 서방 언론은 주목하고 있다.

러시아 핵미사일들이 유럽이나 미국 등을 향해 다시 좌표입력될 가능성에 대해 염려하고 있는 것. 최근 세르게예프 국방장관은 "핵 억지력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대공방어군을 발전시켜나갈 것" 이라고 천명했다.

그는 이어 워싱턴에서 합의된 미국과 나토의 신전략과 관련해 "러시아가 군사정책을 바꾸게 될 것" 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미.러 양국은 오는 2002년까지 핵탄두를 3천5백개로 줄이기로 한 전략무기감축협정 (START II)에 93년 합의했다.

이 협약을 미 의회는 96년 비준했으나 러시아는 아직 의회의 비준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나토의 유고공습 이후 러시아 정치권의 반발이 거세기 때문에 코소보 사태의 수습 이전에 이 협약이 비준될 가능성도 작아졌다.

따라서 미.러간의 긴장은 계속 견지될 가능성이 커졌다.

다만 이날 옐친의 결정은 '정치적 협상카드' 에 불과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실제 공격무기로 사용하겠다는 뜻보다는 여전히 핵전력을 정치적 협상수단으로 사용할 의도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회의에서 러시아가 '전술핵' 개발문제를 강조한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전술핵은 러시아가 국제적으로 약속한 핵관련 협정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개발.실험.배치에 대한 규제가 비교적 적다.

게다가 전술핵은 전략핵과 사정거리만 차이가 날 뿐 효과면에선 대동소이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옐친 대통령의 핵개발 발언이 미국보다 유럽국가들에 더 큰 경고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이런 이유다.

모스크바 = 김석환 특파원,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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