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왜 외국인이 살기 힘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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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나라가 아시아국가 중에서 외국인이 살기에 가장 힘든 나라로 또다시 평가됐다고 한다.

세계화추세에 발맞춰 시장을 개방하고, 외국인투자를 끌어들이고, 지하철 안내방송에 영어까지 곁들이는 마당에 '여전히 꼴찌' 라니 기가 찬다.

싱가포르에 본부를 둔 투자자문회사인 정치경제위험투자자문사 (PERC) 는 아시아 각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거주국가의 치안.주택.자녀교육.의료여건과 문화적 친화성 등을 연례적으로 조사평가해 순위를 매기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도 한국은 대기오염과 높은 언어장벽 등에 따른 문화적 친화성 결여, 그리고 외국인을 위한 서비스와 시설부족 등의 요인 때문에 가장 나쁜 점수를 받았다.

물론 PERC의 평가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가장 살기좋은 나라로 필리핀과 싱가포르가 1, 2위에 꼽힌 것을 보면 언어소통 여부에 평가의 비중이 치우친 듯한 인상도 지울 수 없다.

PERC는 97년 한국의 언론보도를 아시아에서 가장 질이 낮다고 평가한 적도 있다.

그들 나름대로 평가의 잣대가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 결과를 놓고 일희일비 (一喜一悲)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런 평가결과가 한국진출에 관심을 갖는 외국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현실이 마음에 걸린다.

사실 치안과 주거 및 의료여건은 중국이나 태국.대만 등 다른 아시아국가들에 비해 크게 뒤진다고는 보기 어렵다.

대기오염과 교통체증.바가지요금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디에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인들에 대한 우호적이고 융화적인 자세인 것 같다.

영어가 짧아 친절하게 대할 수가 없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어소통 능력에서 우리보다 나을 것이 없는 일본이 세번째 살기좋은 나라로 평가된 것을 보면 분명 우리의 자세와 사회적 태도에 문제가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기업하기 힘들고, 외국인에게 폐쇄적이며, 수출만 알고 수입에는 인색한 나라라는 바깥의 부정적 인식들이 우리에 대한 평가에 은연중 영향을 미친다고 봐야 한다.

외환 및 통상압력에 밀려 시장을 속속 개방한다고 이런 인식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는 없다.

지속적이고 총체적인 사회적 노력이 뒷받침돼야 하고, 여기에는 규제문화의 철폐와 함께 정치안정과 노사간 산업평화도 중요하다.

싱가포르는 근로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공중질서와 깨끗한 환경, 그리고 부패없는 효율적 정부로 외국인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오늘의 번영을 가져왔다.

70년대 이후 20여년간 독일의 상징은 '가장 기업하기 좋은 도이칠란트' 였다.

외국인들에게 무조건 환심을 사자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진정한 세계화는 외국인들과 더불어 사는 심성 (心性) 과 사회적 자세를 갖추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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