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길 따라 '求道여행' -전남보성 차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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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차밭 가는 길은 구도의 길이다. 보성읍에서 율포만으로 가다 만난 보성다원 가는 길은 선승이 암자에 오르는 길처럼 적요하다. 그 길은 항상 아침안개에 축축히 젖어 있다.

선승들은 안개속을 걸어 차밭으로 간다. 그리고 차잎 우려낸 물을 마시며 도를 닦는다. 전남 보성읍 봉산리. 1백80여만평의 차밭이 펼쳐진 국내 최대의 차 평원.

"봉산리가 차밭이 된건 순전 안개 때문이여. " 대한다업 장기선 (46) 전무는 차 재배요건으로 온도에 앞서 습도를 꼽는다.

그런 탓일까. 봉산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안개다. 밤새 율포만에서 불어난 바다안개는 봉산리 일대를 성벽처럼 두텁게 둘러싼다. 봉산리 해무는 햇살이 여간 강렬하지 않는 한 좀처럼 물러설줄 모른다. 차밭은 그 짙은 해무속에 항상 촉촉히 젖어 있다.

차잎은 봄이 되면 진초록에서 초록으로, 그리고 다시 연초록으로 빛깔을 바꾼다. 그리고 마침내 수확철이 되면 그 초록빛이 연하다 못해 황금빛을 이룬다. 봉산리 일대가 황금빛 초록으로 물들면 차잎을 따는 아낙네의 손길은 분주해진다.

지금 봉산리는 '황금축제' 를 코앞에 두고 있다. "날씨야 아무도 알수 없잖여. 허나 벚꽃이 질때 차잎을 따는겨. " 봉산리 노인들의 설명이다.

이달 중순께면 봉산리는 차잎 따는 사람과 차밭을 보러온 사람들로 북적거릴 것이다. 하지만 녹차를 마시고 차밭을 산책하는 일은 회색에 찌들은 도시인들에게는 몸과 마을을 녹색으로 물들이는 일이다.

녹색은 새로운 천년을 맞는 인간에게 가장 희망적인 빛깔이다. 녹색이 사라져 가는 지구를 바라보는 인간에게 봉산리 차밭은 아마 녹색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줄지도 모른다.

봉산리 차밭중 가장 오래된 곳이 대한다업관광농원이다. 이곳에 차 재배를 시작한 게 1957년. 벌써 40여년이 됐다. 이 다원은 30여만평이나 되는 녹색평원이 한장의 달력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다원 입구의 삼나무길은 더욱 볼만하다.

촘촘히 곧게 뻗어오른 삼나무의 열병을 받으며 차밭으로 들어가는 길은 신선하다.

농원 안에는 찻집이 있고 민박집도 있다. 이곳에서는 다도체험뿐 아니라 차잎을 따고, 차밭도 산책할 수 있다. 차밭 산책은 이른 아침이 제격이다. 새벽 차밭을 걸으면 선승이 된다. 화두는 없어도 좋다. 그저 새벽이슬을 머금은 차잎을 바라보는 것으로 족하다.

차밭에 가면 세속을 벗을 일이다. 도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해도 차를 마시는 일은 여유를 찾는 일이다.

차밭은 평지에서 가파른 산록까지 이어진다. 높이 오를수록 차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다락밭처럼 층층히 이뤄진 차밭을 '높이' 에서 바라보는 것은 도시인에게는 분명 충격이다.

그래서 봉산리 봇재 마루에는 '차밭 전망대 (다향각)' 가 있다. 전망대에 만난 김혜경씨 (23) 의 '눈부신 녹색' 이라는 말에 누구든 고개를 가로저을 순 없을 것이다.

녹색의 길이 곧 구도의 길이 될 새로운 천년. 녹색이 그리운 사람들에게 보성차밭은 구도의 여행지가 될 것이다.

이순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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