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전직대통령의 언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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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오른쪽 팔이 없는 장애인 문병설 (42) 씨가 11일 오전 경주~울산간 4차선 국도를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그의 등에는 빛바랜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지난 3월 1일 마산 집을 나와 도보 전국일주를 시작한 지 42일째. '망국적 지역감정 타파를 위한 온국민 한마음 갖기' 가 그가 걷는 이유다.

목포~광주~전주 등 호남지역부터 들러 서울을 찾았던 그는 다시 강원도를 거쳐 영남지역을 훑어가고 있다.

발바닥은 몇번이나 물집이 터졌다 아물어 아예 감각이 마비됐다.

전날엔 봄비가 세차게 왔지만 한쪽 팔이 없는 그로선 우산을 받쳐들기도 힘들어 내리는 비에 몸을 맡기고 그냥 걸었다.

'이상한 사람' 으로 보는 만큼 경비를 대주는 사람도, 기관도 없다.

文씨가 힘겨운 걸음을 떼고 있던 8일. 김영삼 (金泳三.YS) 전 대통령은 부산 자갈치시장에 있었다.

통영.마산.창원.부산 등 부산.경남지역에 국한된 지방 나들이의 마지막 행선지였다.

YS는 10여명의 부산 출신 국회의원 등을 앞에 두고 "경상도 사람이 요직에서 쫓겨나고…" 라는 등 지역감정을 날카롭게 자극하는 말들을 골라 썼다.

이름없는 한 소시민이 지역감정 치유에 보탬이 되겠다며 혼신의 힘을 다해 걷고 있던 때 전직 대통령 YS는 오히려 지역감정을 확대.재생산하고 있었다.

그래서 11일까지도 신문사에는 갖가지 전화가 걸려온다.

정권교체 이후 지역감정 시비를 일으킬 만한 일들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YS의 일련의 발언은 IMF 이후 삶에 쪼들리는 국민에게 "현재의 고통은 정부의 지역차별 때문" 이란 주문을 거는 것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고통의 씨앗은 그의 재임 중 급습해온 환란에 있었고, 위기를 수습하기엔 YS의 리더십에 하자가 있었음을 국민은 안다.

지역감정을 헤집는 그의 언행에선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 복원을 꾀하고 있다는 인상이 역력하다.

YS는 한때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

그에게 지역화합에 나서달라는 부탁까지는 아니더라도,가만히 있어 주기를 국민은 바라고 있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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