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구로에 산다니 식사대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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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구로동에 산다고만 하면 누구에게나 식사를 대접합디다. " 선거감시에 나섰던 공선협 자원봉사자 L씨 (35) 는 30일 있을 구로을.시흥 등 3개 지역 재.보선 현장의 어지러움을 이 말로 대신했다.

그는 "일요일인 28일 영등포 로터리 근처 P음식점에 구로을 주민들이 모인다는 제보를 받고 나갔다.

구로동에 산다고 하니 주소록을 주면서 기재하라고 해 이름과 전화번호를 대충 적었다.

기재내용을 확인하는 사람은 없었다.

10여명의 '유권자' 들이 무표정하게 맥주와 뷔페 음식을 먹고 돌아갔다.

경찰에 신고했더니 책임자인 듯한 50대의 崔모씨는 '어제가 내 생일이라 한턱 낸 것 뿐' 이라며 선거 관련성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래서 수사는 답보상태" 라고 했다.

전체 국민은 물론 해당 지역 다수 유권자들의 관심도 별로 끌지 못하는 재.보선이지만 이렇듯 '얼굴없는 밥사주기' 등으로 현장은 얼룩져 있다.

29일 점심 때 선관위 직원들이 향응 혐의가 있는 구로5동 N음식점을 덮치자 주인은 "당신들이 뭔데 장사를 망치느냐" 고 반발했다.

음식을 나누던 7~8명의 40~50대 아주머니들은 계 모임이라고 발뺌했다.

한 아주머니만 계 이름을 '일심회' 라고 둘러댔을 뿐 나머지는 "모른다" "그냥 따라왔다" 며 말꼬리를 흐렸다.

향응 정도가 아니라 금품살포 흔적도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후보측으로부터 1만원을 받았다" 고 양심선언한 주민이 29일 나왔다.

그러자 후보측은 "상대방 ×××후보측이 신림동 음식점에서 유권자 40여명을 불러 1인당 2만원씩 살포했다" 며 제보자의 신원까지 공개했다.

실제로 지난 27일 합동유세전이 벌어지던 안양의 학교 운동장 구석에선 정당의 통솔자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모집책에게 1만원짜리 30여장을 건네주고, 주변에 있던 아주머니들이 " (돈 나눠주는) 버스는 어디에 있어요" 라고 묻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무엇이 국회의원 2명과 시장 1명을 뽑는 재.보궐 선거전을 이렇게 혼탁하고 험악하게 만드는가.

"무조건 이기고 봐야 한다" 는 강박감이 여야 중앙당으로 하여금 사활을 건 것처럼 앞뒤 안가리게 하는 것 아닌가.

더욱 이상한 점은 그 흔한 정치지도자들의 페어 플레이 강조 발언조차 들려오지 않는 것이다.

전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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