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병욱칼럼] 내각제 딜레마를 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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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올해 정국의 태풍의 눈인 의원내각제 개헌문제는 공동여당 지도부의 합의로 본격거론이 일단 올해 하반기로 미뤄진 듯하다.

그럼에도 국민회의와 자민련간에는 이 문제를 두고 신경전이 간헐적으로 터져나오고 있다.

문제는 국민회의와 자민련간의 내각제 개헌합의가 이론 (異論) 이나 해석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너무 명백한 데 있다.

내각제의 내용은 독일식 순수내각제로 하며, 양당은 집권후 공동정부 출범과 동시에 양당 동수로 내각제추진위를 구성하고, 개헌안 발의는 대통령 발의로 하며, 양당은 개헌후 의석수에 관계없이 연립정부를 구성하되 대통령과 총리중 선택권은 자민련이 우선적으로 갖는다.

요컨대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은 임기의 반만 현행 헌법에 의한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임기 후반은 순수내각제로 바꿔 자민련이 대통령과 총리중 선택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97년 10월말 이러한 DJP합의문이 발표된 직후부터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거나 바람직한 것이냐는 강한 반론이 제기됐다.

그러나 대통령선거가 끝날 때까지 당시 김대중후보와 김종필 (金鍾泌) 자민련명예총재를 비롯한 양당 지도부는 공개.비공개적으로 여러차례 이 합의를 재확인하고 약속이행을 거듭 다짐했다.

필자는 재작년 11월 DJ와 JP를 차례로 면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金후보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金후보는 지난 71년 선거부터 세번 낙선하고 네번째 도전하는, 그야말로 대통령만을 바라보고 살아오다시피 한 분인데 그렇게 어렵게 쟁취한 대통령직을 반만 하고 넘긴다는 것을 실제로 믿어도 되겠느냐, 또 국민이 5년 임기로 뽑은 대통령을 정당간 합의로 임기 중간에 물러나게 하는 건 국민주권 침해가 아닌가, 대통령을 하다가 내각제 총리도 할 수 있겠느냐 등이었다.

金후보의 대답은 대충 이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나라의 민주발전을 위해선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번에야말로 꼭 이뤄져야 한다.

내가 수십년간 준비해 온 경륜을 대통령이 돼 펼쳐야겠는데 그러기 위해선 국민회의와 자민련간의 야권후보 단일화가 필수적이다.

자민련과 야권후보 단일화를 위해선 대통령임기 중간에 내각제로 개헌한다는 합의가 불가피했다.

그리고 그 약속은 꼭 지킬 것이다.

내각제 개헌후 구성될 연립정부의 대통령과 총리중 선택권은 자민련측이 우선적으로 갖는다고 돼 있지만 총선거 결과 양당의 의석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각제에선 총리가 중요하니까 대통령을 했다고 해서 총리를 못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김종필명예총재의 얘기는 더 한층 분명하고 단호했다.

이번 합의는 DJ가 임기의 반만 하고, 후반은 내각제로 바꿔 총선후 의석수에 관계없이 연립정부의 총리를 자민련측이 맡는다는 뜻이다.

나는 DJ로부터 이번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인간적인 다짐을 받았고, 분명히 그렇게 할 것으로 믿고 있다.

권력구조는 국민회의쪽은 이원집정제를 선호했으나 결국 우리가 주장한 독일식 순수내각제로 합의된 것이다.

이렇게 DJP합의 내용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합의문 자체를 놓고는 신축성의 여지가 전혀 없다.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의 선택 뿐이다.

그러나 국민회의쪽엔 내각제 개헌이나 대통령의 임기중 퇴진이 국민의 뜻과는 동떨어진데다 '어떻게 잡은 정권인데…' 하는 거부정서가 매우 완강하다.

DJP합의를 지킬 분위기가 아닌 것이다.

3당 합당후 2, 3인자로 안주하다 14대 총선때 텃밭인 충청도를 잃다시피 하는 아픈 경험을 지닌 자민련도 이젠 2인자로 자족하기가 겁날 것이다.

그렇다고 두 당이 제 갈길로 간다면 극심한 정치불안으로 경제가 다시 곤두박질치는 파국상황이 예견된다.

이 딜레마를 벗어나려면 DJP합의를 지키는 게 명분이 서는 가장 원칙적인 접근이다.

다만 현실을 보면 그 합의를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의 차원을 넘어서는 보다 폭넓은 정치도 도외시해선 안될 것 같다.

예컨대 합의대로 내각제로 개헌하되 총선후 의석수에 따라 자민련의 총리 선택권에 일정한 제한을 두는 보완적 합의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너무 소수당 총리로는 정국 안정이 어렵지 않겠는가.

또 약속 불이행에 대한 비판을 감수하고 국민 앞에 사과하는 전제에서 DJP합의를 국민여론에 바탕을 둔 보다 현실적인 방향으로 보완, 발전시키는 것도 파국보다는 나을 것이다.

양당 지도부가 지금의 유예기간을 큰 정치 모색의 기회로 활용하기를 기대한다.

성병욱 본사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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