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LG전자 노조위원장 나찬경씨 '퇴임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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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23년 노조 전임으로 지내면서 깨달은 것은 바퀴가 한 쪽만 있거나 크기가 다른 수레는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영자를 존경하는 노조와 노조를 이해하는 경영자가 한 몸이 되는 노경 (勞經) 관계를 구축해야 모두가 살 수 있다는 얘기죠. "

땀범벅이 된 부회장의 등에 업혀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노조위원장' 으로 불렸던 LG전자 전 노조위원장 나찬경 (羅燦璟.55) 씨. 32년의 직장생활중 노조 전임기간이 무려 23년. 한 때는 파업투쟁을 진두지휘하던 강성 노동운동가로, 또 한 때는 회사 경영자의 등에 업혀 노사화합의 대변자로 살아온 그가 지난달 노조위원장 자리를 후배에게 물려주고 정년퇴직 (5월) 을 준비하고 있다.

"간혹 나를 어용 (御用) 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맡겨진 일을 충실히 했다는 점에서 후회하지 않습니다." 지난 67년 군 제대후 금성사 (현 LG전자) 선풍기 공장에 입사한 羅씨는 일찌감치 노조와 인연을 맺었다.

의기 넘치는 청년으로서 "생산현장의 부당 대우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 으로 노조활동을 시작, 입사 10년만에 노조전임인 총무부장에 임명됐다.

그후 23년간 사무국장→부위원장→평택지부장→노조위원장으로 변신하면서 숱한 일을 겪었고, 이 과정에서 '원만한 노사관계의 표본' 이란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사실 89년까지만 해도 그는 회사측에서 고개를 흔들 정도로 강경파였다. 87년과 89년 총 46일간의 총파업 때는 평택공장 지부장으로 지게차를 타고 선두에 서서 고속도로를 점거하는 등 극한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장기파업으로 회사가 6천억여원의 손실을 보면서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해외 바이어들이 이탈, 일거리가 줄면서 회사는 물론 종업원들도 큰 피해를 보자 "이러다간 모두 망한다" 는 절박감이 들었다는 것.

고심 끝에 얻은 교훈이 바로 그가 입버릇처럼 내세우는 '수레바퀴' 론. 이때부터 노사관 (勞使觀) 이 바뀌면서 '노경' 이란 새로운 철학을 갖게 됐다. 노사가 수직적.대립적이면서 제 몫만 찾는 관계라면 노경은 수평.협조적 대등관계라는 것. 그는 이를 바로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물론 쉬울 리는 없었다. 회사와 타협하는 쪽으로 노선이 바뀌자 젊은 조합원을 중심으로 강한 반발이 제기됐다.

"사람이 달라졌다" 는 비판도 나왔다. 그는 이 때마다 밤을 꼬박 새워가면서 "회사가 없으면 조합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고 설득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늘어났다.

이런 변화의 결과는 노사관계 및 경영개선으로 나타났다. 지난 93~95년 종업원들은 생산성향상 목표치를 달성, 별도의 성과급을 받았고 96년 그가 노조위원장직을 맡은 후 지난해까지 3년연속 '임금 및 단체협상 무교섭 타결' 이란 진기록을 세워 지난해말 정부로부터 노사화합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구자홍 (具滋洪) 부회장이 그를 업고 뛰는 장면은 96년 11월 노.경단합대회때 이뤄진 것. 당시 노조와 경영진이 편을 갈라 농구시합을 해 노조가 지자 羅씨가 먼저 具부회장을 업고 뛰었고 具부회장이 답례로 그를 업으면서 노사간 신뢰의 벽이 더욱 두터워진 것. 이 사진은 나중에 광고로 제작돼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노사간 갈등이 고조되는 최근 분위기가 걱정이라는 羅씨는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지혜를 발휘했으면 한다" 고 말했다.

김종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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