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답] 9. 태백산 무위정사 조실 서암선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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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대담 = 이은윤 종교전문위원]

한국 불교는 어느 절을 가보아도 큰 스님만 있고 '작은 스님' 이 없다. 세속의 상대적 분별심으로는 대 (大)가 있으면 소 (小)가 있게 마련인데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통상 종단의 감투를 썼거나 쓰고 있는 스님, 나이가 많은 스님, 사암의 간부 승려등을 큰 스님이라 칭한다. 얼핏 보아도 큰 스님이라는 호칭의 필요 충분 조건인 법력 (法力).지혜등과 같은 불교 인격은 간과되기 일쑤다.

불성 (佛性) 절대평등론이나 만물일체사상의 선리 (禪理) 라면 큰 것이 곧 작은 것이고, 작은 것이 곧 큰 것인지라 큰 스님도, 작은 스님도 없고 그냥 '스님' 만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한국의 대표적 선종 사찰인 경북 문경 봉암사 조실을 20여년이나 했고 조계종 종정까지 지낸 '작은 스님' 서암 (西庵) 선사를 찾아가 보았다.

그는 86세의 노령인데도 제자들을 공부하라고 모두 선방으로 쫓아 보내고 태백산 끝자락의 무위정사 (無爲精舍) 라는 가건물 토굴에서 시자도 없이 손수 밥짓고,빨래하고, 변소 치우며 살고 있다.

문 : 태백산의 미묘한 경계 (境界) 는 어떤 것입니까.

답 : 바람은 물소리를 베갯가에 실어오고, 달빛은 산 그림자를 잠자리로 옮겨 온다.(風送水聲 來枕畔 月移山影 到牀邊)

<대관령 보다 훨씬 험한 태백산 죽령 (竹嶺) 을 넘었다. 입춘 시샘 추위가 매서웠다. 그래도 눈이 쌓이질 않아 경북 봉화군 물아면 오전 약수터까지 가는 길의 교통은 괜찮았다. 우선 약수터로 가서 뼈속까지 스며드는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약수를 한 바가지 마셨다. 차를 돌려 나와 산 중턱의 무위정사로 올라갔다.< p>

일체의 인공 (人工) 을 배제한다는 뜻을 담은 '무위' 라는 토굴 편액부터가 흔히 유위법 (有爲法)에 대칭시켜 무위법이라 부르는 선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 무위정사는 겉으로 봐선 전혀 절 냄새도 나지 않는 공사장 야방막 같다.

물음의 '태백산 경계' 는 서암선사의 깨친바 경지를 상징한다. 경계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의 고카라 (Gocara).비사야 (Vishaya) 는 어떤 행위가 발생할 수 있는 영역, 장 (場) 을 뜻한다.

고카라는 소들이 풀을 뜯어먹기도 하고 노닐기도 하는 목초지다. 소들이 그들의 삶을 위한 목초지를 갖고 있듯이 인간도 자신의 내적 삶을 영위할 장소를 나름대로 가지고 있다.

서암 작은 스님의 대답은 태백산 겨울 솔바람을 한껏 즐기고 있는 한 편의 시다. 10평 남짓한 외딴 철판 가건물의 토굴이지만 밤새 벗이 되어주는 빈 창 (虛窓) 의 달빛이 정신속까지 스며드는 월야 (月夜) 의 백광 (白光) 을 어루만지며 사는 삶이다. 기막힌 경계다.

온갖 인해 (人害) 를 뼈저리게 체험하고 난 노장 (老長) 이 그처럼 작은 스님이 돼 자연의 순리에 자신을 내맡긴 방임 (Let - go) 속의 무위 (無爲) 를 살고 있는 경계는 아름답기만 하다.

세상에서 가장 작다는 겨자씨 안에 우주에서 가장 크다는 수미산을 집어넣는 게 선의 묘용 (妙用) 이다. 그렇다면 작은 토굴 속에서 저 큰 태백산으로 마음을 꽉 채워 더 이상 무엇도 들어갈 수 없는 포화 상태가 된 그의 마음 (卽心) 도 한껏 비워낸 무심 (無心) 이다.>

문 : 법랍 (法臘 : 승려 경력) 이 얼마나 되셨습니까.

답 : 8×9는 77이다.

<승려가 된지 얼마나 됐느냐는 물음에 전혀 엉뚱한 곱셈법의 대답을 한다.< p>

세속 곱셈법의 진리는 8×9= 72다. 그렇다면 8×9= 77의 소식은 무엇일까. 서암 작은 스님의 곱셈법은 내가 수행해 닦은 5년분의 도 (道) 는 너한테 줄테니 어서 견성개오 (見性開悟) 토록 하라는 독촉이다. 따라서 77에서 5를 빼면 72가 된다.

그는 원래 승적 (僧籍) 이라는 걸 만들지 않았다. 작은 스님 서암이 승려 호적을 올린 것은 승려가 된지 50여년이 지난 1979년이었다. 그것도 조계종 총무원장이라는 감투를 쓰게 돼 부득이 필요하다고 해서 만들었다.

그러나 현재는 승적이 없다. 94년 조계종단 종권분규 때 종정을 잠시 맡았다가 봉변을 당하자 종단 탈퇴 성명을 내고 무적 승려가 돼버렸다. 이렇게 그는 원래 무적승이었던 자신의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깨달음이라는 게 뭔가. 무엇에도 구애 받지 않는 절대 자유를 획득하는 일이다. 승려 자격증이라는 건 우는 어린 아이를 달래기 위한 가짜 가랑잎 돈 (黃葉錢)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문 : 어떤 것이 계 (戒).정 (定).혜 (慧) 입니까.

답 : 내 여기에는 그렇게 많은 쓸모없는 가구가 없다.

<계.정.혜는 불교가 지향하는 3대 수행 목표다. 이른바 3학 (三學) 이라 한다. 대답 속에는 계.정.혜란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미는 가구같은 장식품이 아니라는 호된 현실 비판이 담겨 있다. 그는 마치 물건처럼 사고 파는 계첩 (戒牒) 장사나 하는 신앙 풍토를 질타한다.< p>

"한국에는 이미 불교가 없어진지 오래" 라고 목청을 높였다. 문중이나 따지고 네 절, 내 절이나 구분하는데 열중하는 불교라면 아무 쓸모 없는 불교란다.

그는 불법 (佛法) 상의 절은 승려의 절이 아니라 국민의, 국가의, 민족의 절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그래서 현재 사찰들이 문화재 관리.보수를 내세워 받고 있는 '사찰입장료' 도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는 절을 가는데 돈을 내야 하는 불교라면 썩은 불교라고 단언한다.>

문 : 찾아 오는 납자들한테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답 : 아침에는 쟁기 끌고 저녁에는 고무래 끈다.

<옛날 산중 토굴의 수행승들은 대체로 '독 (獨) 살이' 를 하기 때문에 밥 짓는 일부터 풀 베고, 변소 치우는 일까지 모든 살림살이를 자신이 직접 해내는 만능이었다. 그러나 시자라는 걸 두어 시봉 (侍奉) 을 하게 하면서 쟁기끌고 밭갈이 하는 일이나 고래 구멍의 재를 긁어내는 일상사를 나몰라라하기 시작했다.< p>

초기 선종은 모기와 산짐승들한테 물리면서도 숲속 바위 위나 자연동굴 속에서 좌선을 계속하는 육체적 고행인 두타행 (頭陀行) 의 수행을 즐겨 했다. 두타행에서는 일의일발 (一衣一鉢) , 오후 불식 (不食) 의 1일2식으로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면서 법력을 양생하는데 전력했다.

그후 선승들도 절을 짓고 모여 사는 개산주사 (開山住寺) 의 승단을 형성했다. 이 때부터는 밥 짓고 농사일 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불법 진리를 터득하는 이른바 농선병행 (農禪倂行) 의 수행 방법을 권장,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암선사의 대답은 만행 (萬行) 입네 하고 차비나 거두는 운수행각을 일삼지 말고 자신을 아는 것이 곧 만유 (萬有) 를 아는 것이니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자기성찰이나 부지런히 하라는 얘기다.>

문 : 오늘 아침 여기에 오느라 한강다리를 건너 오는데 다리가 흐르는지 물이 흐르는지 몽롱하던데요. 어떤게 맞습니까.

답 : 다리가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는다.(橋流水不流)

<머리가 뿅 간 사람들의 이야기 같다. 인류 역사는 5천년동안 물이 흐르고 다리는 가만히 있다 (水流橋不流) 는 것을 진리요 정상이라 해왔으니 말이다.< p>

선은 이처럼 기존의 사유체계를 때려 부수려는 혁명적 열정으로 가득차있다. 과연 그렇다면 선의 논리는 무엇인가. 만약 태양계나 은하계의 수많은 별들 중에 인간과 같은 동물이 살고 있어 그곳 사람들은 '다리가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는다' 라고 보기로 약속하고 그렇게 고정관념화 했으면 그 곳의 진리는 '교류수불류' 다.

따라서 우주 본체에서 보면 '수류교불류' 라는 지구상의 진리관은 아무런 절대성도 가질 수 없는 인간들끼리의 언어적 표현 약속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이 설파하고 있는 기막힌 '발상의 전환' 과 마주하게 된다. 최근 냉동실을 맨 위칸에 두는 고정관념을 깨고 거꾸로 냉동실을 맨 아래에 배치한 냉장고가 히트한 것도 이같은 발상의 전환이다.

지금 '변화와 개혁' 이 개인.가정.사회.기업.국가.세계의 화두다. 이제 혁명적인 변화와 개혁을 통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명을 건설하지 않고는 환경오염을 야기한 20세기 현대문명 이후의 3천년대 인류는 더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절규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종업원 수를 줄이고 부서를 통폐합 하는 구조조정이나 리엔지니어링.벤치마킹 등을 통한 외형적 변화와 개혁은 물리적인 사상누각일 뿐이다.

본질적인 개혁은 발상의 전환에 따른 의식혁명이 수반될 때에만 가능하다. 선은 이미 1천5백년 전 부대사 (傅大士.497 - 569) 라는 선객이 '교류수불류' 라는 화두를 내놓았다. 이래서 선은 이 시대가 목말라 하는 발상의 전환을 이끌 무한한 보고 (寶庫) 인 것이다.>

문 : 요사이 감옥에 사는 80노인이 상도동 사는 옛 어른께 뭉칫돈을 준 일이 있다 하고 당사자는 받은 일이 없다 해서 세간의 화제인데 어느것이 맞을까요.

답 : 유치원엘 가보라.

<유치원을 가면 여.야 정당의 싸움도 대통령 선거자금의 아리송한 수수께끼도 풀린다니 기상천외다. 작은 스님이라 학교 중에 가장 작고 기초적인 '초보' 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내용인즉 유치원생들의 놀음 같다는 일할 (一喝) 이다.< p>

유치원 어린이들은 남자 아이가 옆의 여자 친구 치마를 한번 훌떡 걷어 올리고는 "나 의 뭐 봤다" 고 한다. 이렇게 계속 놀다 보면 여자 친구의 뭐, 남자 친구의 뭐를 서로 다 보고 만다. 그러나 한 어린이도 친구의 진짜 뭐를 본 일은 없다. 이렇게 돼 유치원생들의 울고불고 하던 놀이는 '유치' 하게 끝나고 만다.

심각한 질문이 솜털처럼 태백산 맑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마침 찾아 온 대구의 한 처사가 사온 귀한 겨울철 포도 한 송이를 먹고 4시간여의 긴 법담 (法談) 을 끝낸 후 산중 어둠을 헤치며 서울로 돌아왔다.>

[서암선사는]

▶1913년 경북 예천 출생▶1927년 출가▶1934년 동경 일본대 종교학과 입학▶1937년 일본대 중퇴▶1938년 예천 대창중학교 교사▶1965년 희양산 봉암사 조실▶1979년 조계종 총무원장▶1994년 조계종 종정.종단 탈퇴▶1998년 태백산 무위정사 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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