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뒤집어진다, 군대서 축구한 얘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8면

군대 얘기라면 거품을 무는 사람, 꼭 있다. 그 중엔 이런 기억도 있을 터. 몇 시간을 똑바로 앉아 있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이등병 시절, 내무반에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팔은 일자로 쭉 펴고, 주먹은 꽉 쥔 채 무릎에 살짝 올려 놓아야 하는 그 세밀함 말이다. 팔의 각을 조금이라도 풀라치면 “요즘 군대 참 편해”라는 고참의 한마디가 어김없이 날아온다. 마치 날카로운 비수처럼.

‘스페셜 레터’ 배우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등병 송욱경, 일병 강정우, 병장 김남호, 상병 최호중. [악어컴퍼니 제공]


소위 ‘짬밥’에 따라 팔의 각도가 달라진다는 이 엄연한 현실, 그러나 바깥 사람이 보기에 이것만큼 유치한 게 있을까. “뭘 그런 걸 갖고 시시콜콜 따져? 군대 정말 웃겨”라는 식이다. 군대에 대한 시선은 이토록 이중적이다. 안에선 너무나 치열하지만, 밖에선 실소를 터뜨린다. 뮤지컬 ‘스페셜 레터’는 바로 이 지점을 영리하게 포착해 냈다. 덕분에 여성 관객은 폭소를 터뜨리고, 남성 관객은 새삼 씁쓸한 추억을 곱씹는다. 군대에서 축구 하는 얘기로 개막 보름 만에 객석 점유율 80%를 넘기는 인기를 끌고 있다.

◆편지 주인공은 남자?=스토리 역시 그럴싸하다. 27살에 늦은 나이로 군대간 이등병 이철재는 행동도 굼뜨고, 눈치도 없는 고문관이다. 그 때문에 툭하면 분대원 모두 얼차려다. 고문관에겐 민간에서 가끔씩 날아오는 편지를 읽는 게, 그리고 화장실에서 답장을 몰래 쓰는 게 유일한 낙이다. 이때 날아온 ‘은희’라는 이름이 적힌 편지 한 통. 제대 78일 남긴 병장은 그 은희를 소개시켜 달라고 떼를 쓰고, 궁지에 몰린 이철재는 은희가 남자라는 사실을 숨긴 채 일을 꾸민다. 이후는 짐작대로 가짜 은희를 둘러싼 소동과 좌충우돌이다.

무엇보다 세밀한 묘사가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우정의 무대’에 참가하라는 선임 하사의 지시에 병장은 “이 짬밥에 무슨…”이라며 폼을 잡고, 상병은 “간신히 꺾였는데, 하루 편할 날이 없네”라고 투덜대며, 일병은 말년 병장에게 딱 붙어 PX로 가는 이등병을 보곤 “저 늙은 여우, 답장 온 이후로 아주 군생활 폈구먼”이라며 잔뜩 벼른다.

“아쉬우면 군대 빨리 오던가! 제대 두 달도 안 남았는데 미친개 되게 하네 이 자식이”라든가, 치우기 번거로운 눈을 “송이송이 하이얀 똥덩어리”라고 표현한 노랫말, 흰 장갑에 면봉 들고 청소 검사하는 모습 등등, 무대는 군대 내무반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축구 장면 안무 돋보여=인상적인 장면도 많다. 암전 없이 숨가쁘게 진행되는 속도감, 취침 직전 쏟아내는 애드리브, 축구 하는 모습을 역동적인 안무로 전환시킨 ‘군대스리가’ 등이다.

아쉬움도 있다. 노래는 언제나 상투적으로 나온다.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는 아쉬운 순간에, 초소를 지키며 혼자 있는 시간에, 편지의 주인공을 여자 스타로 상상하면서 등이다. 음악이 스토리를 이끌지 못한다면, 굳이 뮤지컬이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연극에 간간히 노래를 하는 ‘음악극’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그래도 코믹과 스피드, 생생함을 한데 버무리는 솜씨는 예사롭지 않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출신인 박인선(작·연출)·마창욱(작곡) 콤비의 작품이다. 장유정(김종욱 찾기)·추민주(빨래)·민준호(거울공주 평강이야기) 이후 주춤했던 한예종 신예 파워의 새로운 발견이다. ‘스페셜 레터’는 내년 뉴욕 뮤지컬 페스티벌에도 초청받았다.

최민우 기자

▶뮤지컬 ‘스페셜 레터’=올 연말까지 대학로 SM아트홀, 1588-7890.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