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억 수표추적 안하나 못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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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김영삼 전 대통령과 정태수 (鄭泰守) 전 한보그룹 총회장이 9일 이구동성으로 "수표를 추적해보면 알 것" 이라고 주장함에 따라 수표추적의 실시 여부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YS와 鄭전총회장의 말은 같지만 의도는 정반대다.

YS는 수표 추적으로 자신의 '결백' 을, 鄭전총회장은 YS에게 대선자금 '전달사실' 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YS와 鄭전총회장은 어쩐 일인지 촉구만 할 뿐 실제 수표추적이 진행될 수 있도록 법적 절차를 밟지 않고 있다.

YS가 수수 사실을 원천 부인함에 따라 입증 책임을 지게 된 鄭전총회장은 수표번호 등 물증을 공개하지 않았다.

YS로선 대선자금 시비의 확대를 원치 않고, 鄭전총회장은 수표 출처가 알려짐에 따라 비자금 시비가 재연되는 상황을 피하고 싶은 심정으로 풀이된다.

검찰도 독자적으로 이 수사에 착수할 의사를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선 수사할 단서를 잡지 못했다. 국회 IMF 환란 조사특위에서 고발해오면 수사 여부를 검토해보겠다" (朴相千법무장관의 법사위 답변) 는 것이 검찰의 공식 입장이다.

특위도 고발할 뜻이 없다.

장재식 (張在植) 위원장은 "현재로선 고발 등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 고 말했다.

김원길 (金元吉) 국민회의 정책위의장은 일찌감치 "사법처리 대상은 아니다" 고 선을 그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9일 'YS 예우' 방침을 밝힌 것에서도 여권이 YS 대선자금을 본격적으로 해부할 의사가 없음이 감지된다.

모두가 수표추적을 원치 않는 것은 추적 결과가 몰고올 파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鄭전총회장의 진술이 거짓이라면 그의 답변을 이끌어낸 여권은 YS를 상처내기 위한 '정치공작' 을 한 셈이 된다.

반대로 鄭전총회장의 수표가 YS에 넘어갔다면 YS의 도덕성은 회복불능의 손상을 받는다.

또 어떤 경우든 대선자금 시비가 재연될 수 있다.

따라서 정치권에서는 "수표추적을 하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행위" 라고 말한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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