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불신해소의 명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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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인구의 63%가 흑인인 워싱턴에서 흑인이 아니고는 시장에 당선되기 어렵다.

지난달 취임한 앤서니 윌리엄스 시장도 흑인이다.

그러나 윌리엄스는 전임 매리언 배리 시장과는 인종문제에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한다.

배리는 인종문제를 대립의 국면으로 몰고 갔다.

빈민층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으로 네 차례나 시장에 당선됐지만 워싱턴의 재정과 행정은 엉망이 됐다.

결국 파산상태에 이른 시정 (市政) 을 연방의회의 감독위원회가 접수하면서 인사권조차 빼앗기는 수모를 겪고 물러났다.

배리의 강렬한 카리스마와 달리 온건하고 성실한 이미지의 윌리엄스는 워싱턴 시민들에게 지방자치 소생의 희망을 주며 시장에 취임했다.

취임연설에서 고아로 입양됐던 불우한 성장배경을 털어놓으며 이제 자신에게 시장직을 맡긴 워싱턴시를 두번째 양부모로 여기고 최선을 다해 봉사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대목은 많은 시민들을 감동시켰다.

화합을 추구하는 윌리엄스의 실용노선은 벌써 재정의 흑자전환을 약속해 주고 있으며, 연방의회도 신뢰의 표시로 감독위원회의 기능을 축소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배리처럼 화끈하게 흑백문제에 달려들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하는 흑인들도 있다.

"저 친구 흑인 맞아?" 하는 식이다.

'니거들리 파동' 은 그런 배경에서 불거져나왔다.

윌리엄스의 측근보좌관 데이비드 하워드는 백인이다.

하워드가 어느 자리에서 예산집행에 인색해야 한다는 뜻으로 '니거들리 (niggardly)' 란 말을 썼다.

흑인의 비칭 (卑稱) 인 '니거 (nigger)' 와 발음이 비슷한 이 말을 쓴 데는 흑인을 깔보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 흑인직원이 불평하면서 문제가 일어났다.

문제가 일어나자 하워드는 시비를 따지지 않고 바로 사표를 냈다.

윌리엄스는 이를 즉각 수리했다.

하워드가 나쁜 뜻으로 그 말을 쓰지 않았음을 확신하지만 불신의 쐐기가 될 만한 일은 없애겠다는 것이었다.

사표가 일단 수리되자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여론이 크게 일어났다.

근거없는 악의를 부채질하는 인종대립주의를 척결해야 하며 하워드의 사표제출과 윌리엄스의 수리는 이에 대한 굴복이라는 것이다.

윌리엄스는 열흘만에 이 새 여론에 굴복 (?) , 하워드를 복직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일로 인해 윌리엄스는 대가 약한 인물 아니냐는 걱정도 듣는다.

그러나 불신해소를 위해서는 투지보다 양보와 인내가 더 좋은 약이다.

대립감정에 편승해 지지를 확보하는 것은 '작은 정치' 에 편리한 길이다.

'큰 정치' 를 바라는 우리 국민의 마음을 알아주는 정치인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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