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유식한 것도 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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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자정이 넘은 경제청문회 현장. 1월 26일 0시40분쯤. 폐회를 앞두고 나머지 참고인 4명이 한꺼번에 불려나왔다.

시간도 늦었으니 대충 끝낼 참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았던 '참혹한' 해프닝이 벌어지고 말았다.

맨 마지막 참고인으로 불려나온 이강남 (李康男) 한국은행 부총재보를 상대로 장재식 (張在植) 위원장이 직접 신문에 나섰다.

▶張위원장 : 외환위기 당시 환율을 올렸어야 했는지, 아니었는지에 대해 한국은행은 어떤 판단을 하고 있었나요.

▶李부총재보 : 외환보유고의 충분한 확보와 환율의 안정이라는 두가지 목표가 있는데, 굳이 우선순위를 정하라면 외환보유고의 확충이 더 중요합니다.

따라서….

▶張 : (갑자기 흥분해 버럭 소리지르면서) 저런 아부꾼 같으니라구. 환율을 제때 올리지 않아서 나라를 이렇게 망쳐놓고 엉뚱하게 외환보유고 이야기나 하고 앉아있으니, 무슨 정신나간 소리를 하는 거요.

▶李 : 아니, 제 말을 더 들어보십시오. 위원장님 말씀과 똑같은 생각입니다. 외환보유고 확충이 우선이란 뜻은 다시 말해서, 국제수지 개선을 통해….

▶張 : 나는 지난 2년간 15번이나 환율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을 해 왔어요. 그런데도 내 말은 무시한 채 환율정책을 엉터리로 해놓고 여기가 어디라고 낯짝을 들고 나온 거야. (중략)

▶李 : (침통한 표정으로) 위원장님, 죄송합니다.

사람도 몇 없고 파장 분위기가 완연하던 청문회장이 위원장의 노기 (怒氣) 폭발로 순식간에 살벌해져 버렸다.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며 불호령을 계속하는 위원장의 기세에 어쩔줄 모르던 이강남 부총재보는 몇번 변명을 시도하다 그만 "죄송합니다" 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죄인도 그런 죄인이 없는 것처럼. 장재식 위원장은 지론인 환율인상론을 다시 설파하는 것으로 그날의 청문회를 끝냈다.

'내 말만 들었어도 환란을 막았을 것' 이라는 요지였다.

기회 있을 때마다 그가 되풀이하는 말이다.

우연히 이 장면을 TV로 보던 나는 기가 막혔다.

참고인의 진술 내용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중간에 말을 끊으며 듣기 민망한 언사까지 퍼부었으니 말이다.

한번만이라도 설명 기회를 줬더라면 상황이 그처럼 참혹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張위원장은 단 한마디의 설명도 허락하지 않고 참고인을 몰아붙였던 것이다.

위원장의 신문에 무조건 "환율을 올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 게 잘못" 이라고 간단히 대답하지 않고, 공연히 유식하게 설명하려든 것이 죄라면 죄였다.

'요령부득죄' 라고나 할까. 이강남 부총재보는 환란 당시 한은의 국제금융 담당이사였다.

실무책임의 상당 부분을 면할 수 없는 자리다.

그만큼 경제청문회가 밝혀내야 할 사항들에 관한 소상한 실무기록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어떤 중요한 증언을 했을지, 기회조차 주지 않았으니 아무도 모르게 돼버렸다.

아무튼 張위원장의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너무도 명백했다.

'외환보유고 확충이 우선' 이라는 말 자체가 환율안정을 포기해서라도 환율을 올렸어야 했다는 張위원장의 주장을 근사하게 논리화해주는 것이었다.

즉 외환보유고의 충분한 확보가 최우선 과제이고, 따라서 국제수지를 개선해야 하며, 그러려면 외환의 안정에만 집착할 게 아니라 환율을 과감히 올려서라도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억제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불행히도 청문회 위원장은 李부총재보가 '따라서' 이하를 시작하는 순간에 버럭 화를 내버렸다.

외환보유고 확충정책과 환율인상정책이 같은 얘기라는 것을 모르고 오히려 구정권의 정책논리를 변호하려는 것으로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별 기대를 걸지 않았던 청문회였지만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야당이 불참하고 있는 것은 이유를 불문하고 비겁한 짓이요, 여당 단독의 정치공세 또한 상식이하다.

하지만 어차피 시작한 청문회가 아닌가.

높으신 국회의원님들께 딱 한가지만 부탁하고 싶다.

뭔가를 물었으면 "제발 답변할 기회를 주십사" 하는 것이다.

청문회라는 게 영어로도 히어링 (hearing) 이라고 하지 않는가.

일단 들어는 봐야 증인들이 무슨 거짓말을 하는지도 밝혀낼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날 밤의 해프닝은 우리 청문회 수준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상징적인 것이었다.

이장규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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