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이산가족과 미전향 장기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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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부는 북에 가족을 둔 미전향 장기수들을 3.1절 특사때 석방키로 했다.

북에 가족이 있고 29년 이상 복역한 장기수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준법서약서 한장 받지 않고 이들을 석방한다는 것은 종래의 행형 (行刑) 통념상 큰 변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정부의 이번 석방결정이 남북 화해의 큰 틀에서 이뤄지는 인도적 차원의 획기적 조처라고 보고 이를 계기로 남북한 이산가족문제를 푸는 시발점으로 삼기를 남북 당국에 권한다.

현재 미전향 장기수로 감옥에 있는 사람이 19명, 고령이기 때문에 형집행이 정지돼 출옥한 사람이 80여명으로 집계돼 있다.

출옥자 80여명중 북이 고향이거나 가족이 있는 사람이 50여명 된다.

이들 대부분이 민가협 양심수후원회가 운영하는 '만남의 집' 에서 살고 있다.

지난해 세모에 인천방송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망향의 노래' 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이들 미전향 장기수의 생활을 특집으로 방송했다.

80고령에 치매가 된 장기수는 오직 자신의 아들.딸 이름만을 외우고 있었다.

통일전망대에서 북으로 날아가는 새떼들을 보면서 "나는 왜 못가나!" 하며 통곡하는 장기수도 있었다.

이들의 유일한 생존 이유는 북의 가족을 만난다는 것뿐이었다.

남북문제란 센티멘털한 감정으로 해결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가족을 그리워하며 전향을 거부하는 상당수 장기수를 우리가 감옥이나 감옥 밖에서 잡아둘 필요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볼 때가 됐다.

이미 이들 장기수에겐 감옥 안팎의 차이가 별로 없다.

오히려 감옥생활이 체질화된 이들에겐 감옥 밖이 더 두려울 수 있다.

석방된다고 해도 70고령의 이들은 갈 곳도 생계도 막연할 뿐이다.

이런 장기수의 석방결정을 들으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북에도 남의 가족만을 그리며 고령이 된 많은 이산가족과 국군포로가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장기수를 북에 보내고 북은 이산가족 재회에 응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인도적인 일이 될 것이다.

이미 우리는 지난 정부 초 미전향 장기수 이인모씨 북송으로 뼈아픈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우리로선 인도적 차원에서 북송했지만 북한은 그를 혁명열사로 높이 떠받들며 대남선전과 공격에 이용했다.

이런 전철을 밟지 않고 남과 북이 화해와 협력의 물꼬를 트기 위해선 이번 미전향 장기수 석방을 계기로 남북 당국이 만나 국군포로송환이나 이산가족 상봉문제를 새롭게 논의해야 한다.

북으로 가고 싶은 장기수를 북으로 보내고 억류된 국군포로를 남으로 보내면서 이산가족문제를 푸는 문제도 현실적으로 논의해야 할 것이다.

북한은 지금도 김영태씨 등 미전향 장기수 3명의 북송을 요구하고 있다.

북송만을 요구할 게 아니라 남쪽이 요구하는 인도적 차원의 이산가족문제에도 화해적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미전향 장기수 석방을 계기로 남북 당국이 이산가족상봉을 실현시키는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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