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정문연 또 '정치입김' 걱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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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문연) 은 과거 유신정권의 이데올로기 생산.교육기관이었다는 원죄 때문에 정부출연연구기관의 통폐합 논의 때마다 도마에 오른다.

이런 이유로 지난 5월부터 원장이 공석중이던 정문연 새 원장에 제2건국위원회를 발의한 것으로 알려지는 등 새 정부의 각종 위원회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는 서울대 한상진 (韓相震.사회학) 교수가 내정됐다.

절차상 교육부가 추천하고 이사회가 승인하는 형식이지만 사실상 내정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당연히 반겨야할 새 원장 내정에 대해 정문연 구성원은 물론이고 학계에서도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들은 韓 교수의 학문적 성과와 민주적 성향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현재 입장에 비춰 정문연이 또 다시 정권의 부속기관이라는 인식을 받을까봐 걱정한다.

정문연이 정권의 이념을 생산하는 기관이라는 시비를 불러올 경우 지금까지 한국학 연구기관이라는 정체성 마련에 나름대로 부심해온 정문연이 앞으로도 계속 정치적 입김으로 흔들리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정문연 자체가 연구보다 특정 정치세력에 의존해 생존해온 과거를 아직도 철저하게 정리하지 못한 점은 당연히 지적돼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역으로 또다른 정치적 이용의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박정희 (朴正熙) 정권에서 김영삼 (金泳三) 정권에 이르기까지 정권의 정당성을 마련하기 위해 각각 새로운 연구기관을 설립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같은 정치적 의도가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었던가는 최근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비록 정문연이 설립 당시에 정치적 목적이 없다고 할 수 없으나 지금은 문학.역사.철학 등 한국학에 관한한 명실공히 독보적인 연구기관이라는 점에 대해 학계에서는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앞으로 세계화가 진척될수록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요청될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비록 설립 주체와 설립목적이 무엇이든 정문연같은 연구기관의 필요성은 더욱 증대될 수밖에 없다.

정문연이 정치적 외풍에 시달리지 않고 세종의 집현전처럼 연구에만 전념하는 순수 연구기관이 돼야 한다는 학계의 희망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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