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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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제6장 두 행상

상주를 떠난 변씨가 안동에 도착한 것은 그날 오후였다.

내륙에서 동해안 쪽으로 노정을 잡자면 안동을 거쳐야 하는 것이었지만, 아침 나절에 상주를 떠났던 것도 안동에서 차마담을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상주를 떠날 때 전화를 해 두었기 때문에 차마담은 다방을 지키며 변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사와는 나중 만날 약속을 하고 차마담과 같이 다방을 나섰다.

그러나 변씨는 자신이 난생 처음으로 화주가 되었다는 것을 차마담에게 과시하고 싶었다.

그러나 발상 자체가 유치하다는 평판을 들을까봐 주저되었다.

다방 앞에 주차시킨 자동차를 한바퀴 휘 둘러보고 있던 차마담은 그러나 쑥스러운 변씨의 속내를 익히 헤아리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이렇게 큰 차의 화주가 된 기분이 어떠세요?" 기회가 오기를 벼르고 있었던 말이었는데도 막상 질문을 받고 나선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거드름에 값할 만한 대꾸를 찾아 낼 수 없었다.

나이가 오십줄을 넘고 있는데도 여자를 만나면 왠지 이처럼 유치해지는 것인지 스스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빙긋이 웃고만 있는데, 차마담은 꾀꼬리처럼 제가 묻고 제가 대답했다.

"안동까지 오면서 머릿속으로는 포구를 떠나는 채낚기어선 한 척 생각만 하셨겠지요. " 빗나간 짐작이었지만, 변씨는 무릎까지 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점쟁이 속으로 빠졌나. 내 속을 거울 속 들여다보듯 궤뚫고 있었구만. 안동까지 달려올 동안 마담이 지금 한 말 중에서 토씨 하나 안 틀리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는데?" "정말이세요?"

"정말 아니면, 내 손구락에다 장을 지져라. " "거짓말도 엄청나게 하시니깐, 배신감은 들지 않고 오히려 듬직해 보이는 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네요. 나 이런 적 없었는데?" "아니, 거짓말이란 건 또 어떻게 알았나?"

"한번 떠본 건데 당장 실토를 하셨잖아요. 제가 떠돌이생활하면서 지금껏 커피만 팔아온 줄 아세요? 팔도 사람들 구변에 시달려온 내력도 커피 잔만큼이나 많을걸요. "

"나는 놈 위에 업혀 간다더니, 마담이 그렇구만. 그런데도 배신감도 없고 밉지도 않어?" "하룻밤을 같은 잠자리에서 보듬고 지냈다는 걸 하찮게 여기지 마세요. 길가에 피어 있는 들국화라고 모두 그런 부류들은 아니에요. 과장이 심하다는 것은 알지만 선생님 나쁜 사람 아니잖아요. "

"나하고 같이 주문진 갈래?" "못 갈거 없죠. 물건 흥정하듯 묻지 말고 냉큼 데려만 가 주세요. 내가 선뜻 가자니까 어마나 싶어서 가슴 뜨끔하시겠다?" "뜨끔할 거 없어. 여건만 된다면 같이 가. 갔다가 시들하면 되돌아오면 될거 아닌가. "

"저녁 먹고 같이 가요. 가방 하나 챙겨 들면 돼요. 주인마담하고 계산 끝난 지 오래 됐어요. " 전혀 예정에 없었던 일이었다.

안동에 들렀던 것도 차마담에게 과시해 보려 하였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수작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주문진까지 동행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곱다시 배신자가 될 수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차마담은 진정 여행용 가방 하나를 챙겨 들고 나섰다.

다방 문 앞에 나와서 손을 흔들어 주는 한 사람도 없었을 만큼 그녀의 이별은 군더더기 없이 홀가분하고 단출했다.

처음으로 동행이 된 트럭운전사도 그렇겠거니 해선지 아무런 꺼리낌을 두지 않았다.

이제 일행은 세 사람이었다.

셋이란 숫자는 왠지 사람의 마음을 안심시킨다.

차마담을 운전석 가운데 태운 트럭은 때이른 전조등을 환하게 켜고 봉화쪽으로 뚫린 국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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