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 칼럼]열반의 오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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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중력 (重力)에 이끌려 추락하는 물체를 낙체라고 부른다.

한국 경제는 지난해 여름까지만 해도 어쨌든 비행체 (飛行體) 였다.

그 무렵이었다.

외환보유액이라는 연료는 마르고, 국제금융시장에는 채권회수라는 거센 난기류 (亂氣流)가 생겼다.

외환보유액이 메마르게 된 까닭은 주로 정부의 철없는 고 (高) 원화가치 집착 때문이었다.

게다가 우리 경제의 엔진은 진작부터 과잉부채와 저능률 때문에 기업.금융 종합부실이란 심각한 장애에 시달리고 있던 참이었다.

IMF이후 원화 값이 떨어지는 것을 신호로 이 장애는 소비.투자의 급격한 감소와 실업증가로 연결됐다.

그후 지금까지 1년이 넘도록 한국 경제는 낙체상태가 돼 있다.

지금 관심은 세개의 원을 앞에 놓고 초조하다.

하나는 엔진의 수리에 해당하는 구조개혁, 둘은 성장률의 자유낙하 (自由落下) 를 멈추게 하는 것, 셋은 달러 확보다.

이 세개의 원은 구조개혁이라는 원 속에 다른 두 원이 포함돼 있는 동심원 (同心圓) 시스템이라고 보는 견해는 합리성을 가진다.

외환위기가 생긴 것도,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에 들어간 것도 궁극적으로는 모두 구조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구조개혁을 끝내지 않고는 마이너스 성장을 멈추게 하려고 부양책을 써서는 안된다는 논리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합리성만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죽은 기계론에 머물 때가 많다는 가공할 맹점도 갖고 있다.

경제는 사람의 일이자 생명체다.

암 때문에 생명이 위독하다고 해서 암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다가 사람이 먼저 죽게 되는 일이 생겨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몸의 신진대사에서 생기는 원기가 항체 (抗體) 를 만들어 병과 싸워 이기게 하는 선순환 (善循環) 피드백이야말로 진정한 치료과정에 없어서는 안될 부분이다.

과감한 정부투자를 통해 성장률의 자연낙하를 되돌려 놓는 것을 급선무로 여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 움트는 성장력인 벤처산업을 육성하는 것은 물론이고 구조개혁의 '대상' 인 재벌의 것이라도 성장 원기라면 북돋워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일 마이너스 성장이 어느 선 이상으로 심화돼 종내 저성장 악순환으로 발전하면 그때는 구조개혁을 할 필요도 없어지고 만다.

구조개혁 일변도 (一邊倒) 주의자.만능 (萬能) 주의자.속결 (速決) 주의자들의 주장을 들으면 나는 거기서 '열반은 현실세계에 존재할 수 있고 정부는 그것을 만들 수 있다' 는 주장이 갖는 '열반의 오류 (Nirvana Fallacy)' 를 느낀다.

그들의 말에 진리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에서는 오히려 음모를 느낀다.

경제가 낙하하고 있는 지금이 전면적 구조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는 최적기라는 말이나, 정부가 구조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장은 옳다.

그러나 최적기이긴 하지만 기업과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은 정부가 아니라 오직 시장의 압박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정부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지만 기업지배구조 개혁과 투명경영을 위한 새로운 틀을 짜는 것과 꼭 필요한 곳에 공적 자금을 대주는 것에 한정돼야 한다.

한국 경제의 당면한 위기를 '시장의 실패' 탓으로 돌리는 비약에서 이 음모는 절정에 달한다.

시장경제에서 시장의 실패는 어디선가 늘 생기고 있다.

그러나 공기의 오염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소유권이 전적으로 불분명한 경우가 아니면 시장의 실패는 크기가 미미하고 범위가 국소적이다.

서유럽의 중도좌파 정권들이 갖고 있는 시장의 실패와 그 교정 (矯正)에 대한 관점은 '시장의 성공' 은 크고 '시장의 실패' 는 미미하다는 가정을 전제한다.

지금 같은 경제전체의 자유낙하를 시장의 실패라고 진단하는 것은 명령경제의 큼지막한 도입을 위한 음모가 혹 아닐까. 실은 이번 경제위기는 '정부의 실패' 또는 '동아시아 정치와 경제의 시장적 모순' 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구조개혁 일변도주의자의 전략표적은 재벌에 집중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재벌은 사실 반 (半) , 악선전 반을 합해 정경유착의 대명사가 됐다.

사회적 원성의 대상이 돼있는 데다 경제위기를 당해 맥을 못 쓰고 있다.

레닌의 '썩은 문짝 차서 부수기' 처럼 정당성과 용이성을 둘 다 갖추고 있다.

구조개혁 만능주의자들의 음모에는 공격도 있지만 선무 (宣撫) 도 있다.

과장된 경제회복 낙관론이 일각에서 체계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은 실직자들을 선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전선 (戰線) 은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를 향해서도 펼쳐져 있다고 의심할 만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열반의 오류' 로서는 낙하하는 한국 경제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강위석(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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