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김영희 칼럼

북한 압박, 강약 조절이 열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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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한·미 간 대북 공조에 정통한 소식통은 미국 정부가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방북 결과의 80% 정도를 한국 정부에 알려준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나머지 20%는 클린턴이 김정일과의 회담과 만찬에서 받은 주관적인 인상이기 때문에 클린턴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공유할 부분이다. 미국 정부한테 들은 것을 토대로 한국 정부가 추측하는 바에 따르면 클린턴은 정부로부터 기자 석방 말고는 협상자로 행세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제한을 받고 평양에 갔기 때문에 핵을 포함한 북한 문제의 해결 방안에 대한 자신이 보는 오바마 정부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설명하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래서 김정일도 맥이 좀 빠져 북한의 입장을 길게 설명하는 가운데 오바마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메시지를 클린턴에게 건넸다. 김정일은 그들이 말하는 미국 대북 적대시 정책의 중지를 관계 개선의 조건으로 강조했다.

클린턴 방북의 효과를 계산하는 출발점은 김정일이 클린턴을 불러들여 무엇을 얻었느냐를 따져보는 것이다. 김정일은 대내적으로 득점을 많이 했다. 그는 미국의 전 대통령이요 현직 국무장관의 남편이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를 ‘찾아뵙고’ 미국 기자들이 북한의 국경을 침범한 데 사과하고 선처를 호소했다고 선전할 수 있게 되었다. 대외적으로 김정일은 12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은 미국 기자들을 풀어주는 넓은 도량을 과시하는 선전효과를 올렸다고 만족할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에 한 가지 흠이 되는 것이 현대아산 직원 문제다. 미국인에게는 관대하고 동족에게는 인색하다는 인상은 김정일이 과시하고 싶은 ‘넓은 도량’과 어울리지 않는다. 분위기상 유씨 석방은 클린턴 방북효과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않는다.

일부 북한 전문가들은 클린턴이 김정일에게 미국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했기 때문에 공은 북한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한다. 클린턴이 설명한 미국의 입장에는 비핵화 없이는 북·미 관계 개선을 기대하지 말라는 냉정한 현실론도 들어 있다. 유엔 안보리가 주도하는 제재와 미국이 강행하는 추가 조치에 북한은 분명히 숨이 막힌다. 그러나 북한은 숨이 막히는 상태로 버티는 데 이골이 난 이색집단이어서 미국도 북한의 숨통을 조이는 상황을 무한정 계속할 처지가 아니다. 제재는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다. 미국이 북한을 압박하는 것은 북한이 뒤집을 수 없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의 방안을 가지고 6자회담에 나오게 하는 강도 높은 수단일 뿐이다.

클린턴 방북 이전과 이후의 북·미 관계는 온도 차가 클 것이다. 뉴욕 타임스의 외교전문기자 데이비드 생어가 10일 오바마 정부가 북한의 핵 기술 수출에 대한 고전적인 봉쇄 쪽으로 정책의 초점을 서서히 옮기고 있다고 보도한 것도 클린턴 방북 이후 워싱턴에서 감지되는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생어는 이렇게 말했다. “오바마의 참모들 중에 북한이 핵무기와 관련된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단기적이고 현실적인 목표는 김정일이 조잡한 핵무기 제조 기술을 수출하여 돈을 벌고 힘을 기르는 것을 예방하는 것이다.” 이건 오바마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관계없이 앞으로의 대북 정책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새로운 인식을 전제로 추진할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바로 지난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보고 들은 미국의 변화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는 과거의 어떤 제재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이다. 거기다 미국은 독자적으로 북한의 대외 거래창구를 틀어막고 있다. 이대로 반 년이 지나면 북한은 중국의 많은 은행에 갖고 있는 소액계좌 말고는 대외 금융거래의 채널을 거의 모두 잃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이 클린턴과 현대아산의 현정은 회장을 초청한 것도 이런 엄혹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북한 사람들 입에서 추가 핵실험이니 미사일 발사니 하는 도발적인 발언이 사라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제재 효과에 고무된 미국은 효과가 날 때 더 밀어붙이자는 태세다.

문제는 제재의 강약 조절이다. 어디까지 압박하면 제재 효과가 극대화되어 북한이 합의사항 이행을 약속하면서 6자회담으로 돌아오고, 제재가 어느 선을 넘으면 북한이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같이 절망적인 심정으로 핵·미사일 실험이라는 자해행위로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널 것인가를 치밀하게 계산할 때다. 북·미 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은 지금 현대아산 직원의 석방은 남북관계에 의미있는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 그의 석방에 대한 우리 반응은 북·미 관계의 변화에 맞는 것이어야 한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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