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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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제6장 두 행상

"그럴싸하게 둘러댔다고 생각했다면 착각입니다. 원가계산조차 들쑥날쑥인 행상꾼들에게 어느 놈이 단골을 두겠어요. 시골사람들 어수룩하지 않다는 건 선배도 알고 있잖습니까. " "자리만 바꾸지 않고 돈을 돌려주면 장마당에 소문이 금방 퍼질걸. "

"우리가 떠돌이 노점상이란 걸 잊지 마세요. 안동장날 다시 돌아오게 될지 엉뚱한 곳으로 떠돌게 될지는 선배가 알겠습니까 내가 알겠습니까. " 변씨와 철규의 입씨름을 귀여겨 듣고 있던 차마담은 승희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정말 기약이 없는 분들이세요?" "그럴지도 모르죠. " 입을 반쯤 벌리고 승희와 변씨를 바라보던 차마담의 입에서 탄성이라고 말해야 옳을 한마디가 가만히 흘러 나왔다.

"어쩜? 정말 멋지다. 이 항구 저 항구 지향없이 떠돌아다니는 마도로스들이 그렇잖아요. " "마도로스로 보는 건 말도 안돼요. 우린 털어도 먼지뿐인 땅강아지들인데요 뭘. " 아니에요 하면서 차마담은 곁에 앉은 변씨의 팔짱을 끼면서 우리 어울려요 하고 묻기까지 하였다.

승희의 가슴을 적시는 것은 차마담이 가진 소녀적 정서였다.

어떻게 보면 어딘가 모자라는 듯한 60년대식의 유행가적 정서가 차마담의 가슴에는 조금도 퇴색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세파에 부대껴 닳고 닳았을 여자에게 추억으로도 가치개념을 상실한 구닥다리의 정서가 고스란하다는 것이 이상하게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 했던 변씨의 독백이 생각날 정도였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변두리 삶에 길들여지기까지 그녀가 겪었던 좌절과 질곡도 수다했음이 분명할 텐데, 어떻게 저토록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경한 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 순간 승희는 어떤 정체불명의 욕구를 느꼈다.

그녀는 느닷없이 좌중을 돌아보며 물었다.

나 노래 한곡 불러도 돼요? 꼭 부르고 싶다면 만류할 거 없지. 태호는 장마당에서 하루 종일 노래로 살아가는 처진데 승희라고 못 부를 거 없지. 변씨가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나 태호가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이 집이 돼지고기 집이란 걸 누님 명심해요. 이 댁 아지매는 돼지 멱따는 소리에 질렸을 텐데 참으시지. 그렇지 않아. 나 돼지 멱 따는 소리 안할거야. 선배가 앉아 있는데, 쑥스럽지 않으실까.넌 왠 간섭이 그렇게 끈질겨. 철규 들으란 노래가 분명할 텐데 니가, 왜 쌍지팡이야.

다정했던 사람이여 나를 잊었나/벌써 나를 잊어 버렸나/그리움만 남겨놓고 나를 잊었나/벌써 나를 잊어 버렸나/그대 지금 그 누구를 사랑하는가/굳은 약속 변해 버렸나/예전에는 우리 서로 사랑했는데/이제 맘이 변해 버렸나/아 이별이 그리 쉬운가/세월 가 버렸다고 이제 나를 잊고서/멀리 멀리 떠나가는가/아 나는 몰랐었네/그대 마음 변할 줄/난 정말 몰랐었네/오, 너 하나만을 믿고 살았네/그대만을 믿었네/오, 네가 보고파서 나는 어쩌나/그림움만 쌓이네…. 차마담도 간간이 따라 불렀던 그 한 곡을 마치고 승희는 탁자 위에 놓였던 소주 두 잔을 연거푸 마셔 버렸다.

모두들의 시선이 어느새 다시 졸기 시작하는 철규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태호 니 장타령보다는 원래 고급스럽다.

변씨가 이죽거렸으나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태호는 대꾸가 없었다.

승희의 눈 가장자리가 젖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을음이 낀 벽시계를 힐끗하던 태호는 낙맥을 하고 졸고 있는 철규의 팔짱을 끼고 곁부축하면서 말했다.

모두들 일어서시죠. 그 식당 앞에서 차마담은 다시 변씨에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가 단호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비틀거리는 철규를 양 옆에서 곁부축하며 걸어가는 일행의 뒷모습을 변씨는 엉거주춤하게 서서 바라보면서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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