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주민소환제, 지역·정파 이기주의에 멍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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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태환 제주지사가 6일부터 직무를 정지당했다. 26일 주민소환투표를 하기 때문이다. 제주 강정항에 민·군 복합 항구를 설치하려는 중앙정부의 계획안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다. 이 계획은 2007년 5월 제주도민의 여론조사까지 거쳐 수용됐다. 그런데도 주민소환이 발의된 것이다. 2007년 5월 주민소환제가 실시된 이후 실제로 적용된 두 번의 사례를 보면 이 제도가 악용되고 있다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주민소환운동본부 측의 주장을 들으면 제주도가 마치 다른 나라에 속한 땅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들은 “(김태환)도지사는 일방적이고 부실한 여론조사로 강정마을을 군사기지로 결정해 정부에 상납하는 행태를 보였다”고 주장했다. 안보 문제를 놓고 어떻게 ‘상납했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지 어이가 없다. “평화의 섬에 해군기지가 들어오면 안 된다”면 제주도의 평화는 누가 책임진다는 말인가. 제주 해역은 군사·경제적으로 전략적 요충지다. 곡물·원유 등 전략물자와 수출입 물품의 해상 교통로다. 해양과 대륙의 열강세력이 맞부딪치는 교차지역인 데다 무해통항권을 가진 북한 선박이 드나드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이 해양으로 뻗어나가는 길목에 해군기지가 없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 국가적 사업에 협조했다고 도지사가 소환된다면 나라도 아니다.

2007년 경기도 하남시의 김황식 시장에 대한 주민소환투표는 광역화장장 유치계획 때문이었다. 그때는 투표율이 유권자의 3분의 1을 채우지 못해 부결됐다. 어쨌건 두 번 모두 국책사업을 추진하다 자치단체장이 곤욕을 치렀다. 주민소환제가 지역 이기주의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정치적 반대자들이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이 제도를 악용할 경우 정상적인 행정이 어려워지고, 재정적 낭비도 커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당장 주민의 인기를 끌 만한 사업만 하게 되고, 국가적으로 필요한 사업은 팽개치는 부작용을 피할 수 없다.

물론 헌법재판소는 이 법률에 합헌 결정을 내렸다. 전체 유권자의 10%(광역단체장)와 15%(기초단체장)로 발의하는 것은 충분히 엄격하다는 것이다. 또 비리뿐 아니라 정책에 대해서도 소환투표를 할 수 있도록 사유를 제한하지 않은 것도 합헌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헌재의 결정은 이 법률이 합헌이라는 의미 이상은 아니다. 부작용이 드러나 그것을 보완하는 것은 입법부가 할 일이다. 지역 이기주의와 정파 이기주의에 국가안보와 국책사업마저 방해받아서는 곤란하다. 주민소환제를 도입한 당초의 취지가 훼손되지 않도록 관련법을 손질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