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세상보기]“여기도 야단 좀 치셔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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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통령이 장관들을 야단쳤다.

20일 경제대책회의에서 대통령은 우리가 그동안 잘한 게 뭐 있나, 장관들은 왜 현장에 나가 보지 않는가, 은행 구조조정이 끝났는데 왜 돈이 돌지 않는가라고 질책했다.

장관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르자 대통령은 다 잘해 보자는 얘기라며 나중에 악수를 청하기도 했다.

(참 자상한 양반이다!) 그러고 보니 DJ는 YS와 다르다.

YS라면 이맘때쯤, 즉 정부 출범후 8개월쯤에는 개각을 생각했다.

YS 정부의 5대 단명장관은 누구인가.

평균수명이 여덟달 반을 조금 넘는 (어째 어감이 이상하다) 경제부총리.내무장관.총무처장관이 있고, 정확히 일곱달 반밖에 안되는 보건복지장관.정무1장관이 있다.

앞으로 단명장관이 또 나타날지 모르겠으나 아직은 안심이다.

DJ는 장관을 바꾸는 대신 야단을 치니까. 야단맞은 장관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사지선다형 (四枝選多型)에서 답을 고를 수 있다.

①나는 열심히 일하는데 대통령이 뭘 모르고 야단을 친다. 억울하다.

②곰곰 생각해 보니 나는 능력이 없다. 물러나야 겠다.

③열심히는 하지만 나에게 부여된 임무가 너무 크다. 일을 줄여야 겠다.

④왜 나만 야단을 칠까. 야단 맞아야 할 곳은 나 말고도 수두룩한데.

정답은 ①번일 리가 없고 ②번도 아니다.

③번이다.

또 ③번이 돼야 대통령이나 장관, 국민 모두가 편해진다.

관청이 일을 줄이는 것을 요즘 유행하는 말로 규제혁파라고 한다.

규제혁파는 새 시대의 나아갈 길이라고 지금 한창 목청이 높지 않은가.

그렇다고 ④번은 영 틀린 답일까. 요즘 화제가 되는 기아 (起亞) 처리과정을 보면 ④번도 정답일 수 있다.

장관을 꾸짖는 것이 좀 더 적극적으로 일하라는 국민의 바람을 대변한 것이 라면 기아의 처리과정에서 느낀 국민들의 경악과 환멸을 위로할 질책이 있어야 한다.

도대체 기아의 부채규모는 어찌 그리 큰가.

낙찰자가 탕감받은 7조3천억원, 낙찰자가 떠안게 된 6조원을 합치면 13조원이 넘는다.

그러고도 실사 (實査) 과정에서 '숨겨진 부채' '우발적 채무' 가 더 나타날지 모른다.

어찌된 영문인지 자고 나면 부채가 늘어난다는 한탄도 있다.

기아회장에게 중형을 선고하며 판사는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귀하는 천문학적인 적자를 초래하고도 주주와 국민들에게 이를 감추고 속였다. 거기다 재무제표 (財務諸表) 를 조작해 수조원을 대출받음으로써 금융기관까지 부실하게 만들었다. " (참 명판관이다!)

이것도 모르고 주주와 국민은 당초 부도난 기아를 살려야 한다고 소리를 질러 댔다.

미모의 탤런트까지 나서 기아차를 팔아 달라고 호소했다.

정치권도 기아를 감싸 안기에 바빴다.

환란 초래의 책임을 추궁당하고 있는 경제팀은 후일 이 사정을 이렇게 술회한다.

"기아는 엄연히 부실기업이다.

그런 기업에 대해 자금지원을 해주지 않는다고 정치권이나 언론이 아우성을 쳤다.

부실기업이므로 시장원리에 맡겨 해결하라는 얘기는 없었다. " (동아일보 98년 2월 14일 보도)

또 야단맞아야 할 곳이 바로 채권단이다.

기아입찰을 주도한 채권단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다 자신들이 받아야 할 빚을 스스로 날려 버리는 우 (愚) 를 범했다.

기아의 1차응찰자는 3조원만 탕감해 주면 기아를 인수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채권단은 한푼도 탕감할 수 없다며 유찰시켰다.

2차입찰에서는 5조원만 탕감해 주면 기아를 사겠다고 했다.

그러나 채권단은 3조원 이상은 안된다고 거부했다.

드디어 3차입찰에서는 7조3천억원을 탕감해 줘야 했다.

날이 갈수록 경매자에게 불리해진 희한한 입찰이 이뤄진 셈이다.

그 결과 공중에 날아 간 7조원은 누가 책임지나. 또 무고한 국민 부담으로 넘길 것인가.

그러니 대통령의 마지막 야단은 이래야 될 것이다.

"금융인 여러분, 여러분의 구두는 반짝거리는데 머리는 왜 그렇지 못합니까. "

김성호(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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