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관전기]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추석연휴가 끝난 8일 전북 전주 (全州) 시엔 8강전의 얼굴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국장인 코아호텔에는 삼성화재배세계바둑오픈 8강전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크게 나붙었고 대국장과 해설장 검토실 등엔 TV중계를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다.

전주는 이창호9단의 고향이다.

전주 바둑팬들은 이점을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또 이곳에서 멀지않은 부안 (扶安) 은 한국바둑의 개척자 조남철9단의 고향이며 조9단의 일족인 조치훈9단 최규병8단 이성재5단 등도 이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중 이창호 조치훈 이성재 3명이 삼성화재배 8강에 올랐으니 지역의 바둑팬들이 은근히 자부심을 가질만도 하다.

그러나 조치훈은 부산에서 태어났고 또 한 명의 한국인 8강진출자인 유시훈7단은 경북 안동 출신이다.

또 조치훈과 유시훈은 어린 시절 일본으로 떠나 줄곧 그곳 무대에서 활동해 온 탓에 이번 대회엔 본의 아니게 일본대표로 출전하게 됐으니 이들에겐 바둑판이 고향일 뿐 더이상 따지고 드는 것은 덧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치훈과 맞붙게 된 중국의 류샤오광 (劉小光) 9단은 스님처럼 머리를 박박 밀고 나타나 이번 일전에 대한 비장한 결의를 드러냈다.

마샤오춘 (馬曉春) 9단은 언제나처럼 부채를 하나 쥐고 살랑살랑 걸어왔는데 조선족 기자이자 통역인 이철용씨는 "마9단에게 대운이 있는 것 같다" 고 말한다.

마9단은 약 열흘전 쯤 중국에서 일행 3명과 승용차를 타고가다가 큰 사고를 만났는데 한명이 사망하고 두명이 중상을 입었으나 마9단만은 찰과상 하나 없이 멀쩡했다는 것이다.

8일 오전9시30분 8강전 네 판중 두 판의 대국이 시작됐다.

사람좋기로 소문난 고바야시 사토루 (小林覺) 9단은 저승사자 이창호9단과 만나 초반부터 밀리기 시작했다.

TV 생방송을 위해 현지에 내려온 조훈현9단과 유창혁9단은 해설자로 밀린 아픔을 딛고 전주 팬들에게 이창호의 필승지세를 잘 설명해주고 있었다.

바둑은 스포츠와 달리 선수만큼 수를 읽지 못해서는 악수가 왜 악수인지 즉각 설명해줄 수 없다.

그러니 바둑에서는 일류들이 상금뿐 아니라 해설까지 독차지하게 된다.

오후 4시무렵 마샤오춘은 일본의 노장 가토 마사오 (加藤正夫) 9단을 여유있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창호 때문에 가슴에 피멍이 들었지만 마9단도 역시 천재중의 한명. 그는 곧 백으로 4집반승을 거뒀다.

그런데 믿었던 이창호가 갑자기 난조에 빠져 해설장과 검토실 모두 스산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9단은 모종의 부담감 탓인지 전에도 고향만 오면 지곤 했다.

왕위전이나 국수전등 이곳에서 많은 바둑을 두었으나 승률은 30%를 밑돈다.

또 그 징크스일까. 필승이라고 믿었던 이9단의 바둑이 몇번 턱없는 완착 끝에 '도저히 힘든' 형세로 변해버린 것이다.

당황한 이9단은 장고를 거듭하여 곧 마지막 1분초읽기에 몰렸고 그바람에 마치 패라도 난 것처럼 이곳 저곳 시간연장책을 쓰며 필사적으로 수를 봐야했는데 세계최강자로서는 실로 진땀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박치문 전문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