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일본 총리의 ‘핵무장론’ 흘려들어선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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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일본은 1967년부터 핵무기를 제조·보유·반입하지 않는다는 ‘비핵 3원칙’을 견지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핵무장 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주기적으로 해왔다. ‘비핵 3원칙’을 선포한 당시 사토 총리도 핵무장에 대한 비밀 검토를 지시한 적이 있다. 나카소네 전 총리가 방위청장관이던 70년에 발표된 방위백서는 “소규모 전술상의 방어용 핵무기를 소유하는 것은 법적으로 가능할 수 있다”고까지 밝힌 적이 있다. 한마디로 헌법상 공격용 핵을 갖는 것은 어렵지만 자위를 위한 소규모 핵 보유는 가능하다는 것이 일본 정·관계의 저변에 깔린 인식이다.

두 발의 핵무기로 패전국이 된 일본 국민들의 핵에 대한 저항감, 즉 ‘핵 알레르기’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핵무장과 군사대국화를 지지하는 의견은 전후 일본사회에서 쉽게 표출되기 어려웠다. 그런데 평범한 일본국민의 이런 인식을 바꿔놓은 것이 바로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이다. 93년 5월 북한이 일본을 공격할 수 있는 중거리미사일을 개발하면서부터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북한 위협론’이 일본 국민에게 먹혀 들기 시작한 것이다. 98년 대포동미사일 시험은 ‘북한 위협론’이 일본 사회에 뿌리 내리는 계기가 되었고, 2006년의 1차 핵실험으로 ‘북한 위협론’은 활짝 꽃을 피웠다. 지난 4월 북한이 3차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했을 때, 일본 전역이 비상상태였지만, 일본 국민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오죽하면 자위대 군인들이 김정일의 사진을 향해 감사의 절을 한다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이 일본의 군사대국화라는 더 큰 화를 자초하는 화근이 되고 있는 것이다.

북핵 문제의 키를 쥐고 있는 중국은 북한의 핵보다 정권 붕괴를 더 걱정한다. 따라서 북핵을 이대로 방치하면 또 다른 차원에서 중국이 엄청난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중국지도부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조치가 필요한 것은 맞다. 특히 중국이 일본의 군사적 움직임에 아주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점에서, 아소 총리의 ‘핵무장 발언’이 중국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아소 총리의 발언이 한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석상에서 나왔다는 점에서도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런 발언들이 축적돼 일본의 핵무장이 기정사실화되는 상황, 즉 일본 핵이라는 ‘절대 악’이 ‘필요 악’으로 둔갑하는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

북한의 핵 보유를 예방하는 데 실패한 우리에게 남은 현실적인 대안은 ‘북한 핵의 관리’다. 북한이 내부의 변화를 통해 스스로 핵을 포기하도록 하는 길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 핵무기를 일거에 없애겠다는 성급한 마음에서 북핵 문제에 ‘올 인’ 하고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선 한국이 정부 차원에서 일본의 핵무장에 반대한다는 분명한 선을 긋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전성훈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