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처 잇단 부도…기업들 부실채권 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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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독종같이 챙기자. ' 서울 중심가에 있는 A사 사무실에 들어서면 벽에 써붙인 붉은 글씨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회사는 거래처에 물건을 팔고 못받게 된 돈이 3백억원대에 이르자 전 사무실에 이런 '표어' 를 붙여놓고 직원들에게 경각심을 높이고 있는 것. 심각한 불황 속에서 수년씩 믿고 거래하던 주거래처마저 잇따라 쓰러지면서 각 기업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부실 채권으로 비상이 걸렸다.

이로 인해 자금압박이 가중되자 일부 업체에서는 채권회수 담당직원 뿐 아니라 전직 경찰관계자.채권회수 전문업체까지 동원해 '돈 받기' 에 나서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부에서는 '떼인 돈' 에 대한 손비처리를 받아놓고도 연대보증인을 찾아내 돈을 받아내는 등의 무리한 일도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 쌓여가는 부실채권 = 5대 그룹 계열인 B사의 경우 올들어 물건을 대주고 아예 떼이거나 못 받게 된 돈이 지난해보다 3배나 늘어난 4백억원대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올 예상 매출액 (약 1조원) 의 4% 수준으로,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위험수위 (1%) 를 이미 훨씬 넘어섰다.

B사 관계자는 "올 매출은 지난해보다 37%나 급감한 반면 믿었던 거래처마져 돈을 안 줘 추석을 앞두고 직원들 상여금도 제대로 못 줄 지경" 이라면서 "그렇다고 거래를 하지 않을 수도 없어 걱정" 이라고 울상을 지었다.

모 그룹 관계자는 "거래처로부터 돈을 떼이는 사례가 지난해보다 3~4배나 늘었다" 며 "회사 규모.업종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보통 수백억원에서 많게는 수천억원대에 이르고 있을 정도로 부실채권 문제가 심각하다" 고 말했다.

◇ 빚 회수에 나선 기업들 = 대기업 C사는 최근 채권회수 전문업체에 용역을 의뢰했다.

부실채권을 회수해 주는 댓가로 용역업체에 회수금액의 10%를 주기로 한 것.

C사 경리담당 임원은 "용역업체에서 올해 50억원 정도의 부실채권을 회수해주기로 합의했는데 이중 상당액을 이미 받아냈다" 고 말했다.

L사는 부실채권 회수를 촉진하기 위해 최근 사내에 '로 (law) 스쿨' 이란 모임을 구성, 매주 토요일 채권회사 담당자들이 모여 서로 경험과 노하우를 교환하고 있다.

대기업인 D사의 박모 (37) 씨는 "최근 담당임원이 불러 퇴출자 명단에 포함돼 있는데 부실채권 회수 부서로 옮겨 실적을 올리면 구제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채무자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며 한숨 지었다.

이밖에 일부 업체에서는 전직 경찰관계자 등을 개별적으로 고용해 한달에 최고 1천만원까지 지불해가며 연대보증인의 주소와 거래처의 숨겨논 재산현황을 추적하고 있다.

부실채권 회수 전문업체의 한 관계자는 "채무자를 상대로 우선 숨겨놓은 재산을 추적한 다음 법적인 조항을 들이대며 따지는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고 말했다.

지난 93년 친척의 대리점에 연대보증을 섰던 대기업체 임원 최모 (47) 씨의 경우 최근 이들에게 3천7백원을 물어줘야 했다.

◇ 보증을 엄격하게 요구한다 = 대기업과 거래하는 곳들은 보통 담보를 제공하고 2명 정도의 연대보증인을 세우는데, 그동안은 한번 보증인을 세우면 매년 갱신하지 않는게 관례였다.

그러나 올 3월 대법원에서 이런 식으로 연대보증한 사람은 매년 보증을 갱신하지 않으면 효력이 없다는 판례가 나온 이후 각 기업들은 매년 보증을 갱신토록 요구하는 것은 물론 부실채권에 대해서는 수년 전에 세운 연대보증인까지 찾아내 악착같이 회수에 나서고 있다.

김시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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