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함민복 '질긴 그림자' 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태양이 어서 일터로 나가라고

넥타이를 매주듯 그림자를 매주었다

그림자를 지워버리려고 그림자와 같은

색칠을 했다

농부도 들판에서 그림자를 파내고 있다

달이 뒤에서 앞에서 자신의 포즈까지

바꾸며

뒷모습만 나오는 흑백 그림자를 찍어주

었다

그림자를 지워버리려고 그림자와 다른

색을 지웠다

올빼미가 제 그림자가 되어줄 들쥐를

내리 쪼았다

- 함민복 '질긴 그림자' 중

농촌풍경이 무정한 모더니티로 변신하고 있다.

탁 트인 들녘의 느낌. 왜냐. 여기에는 화자 (話者) 인 '내' 가 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내가 본 사물의 주지적 동작 뿐이다.

묘한 함민복 (咸敏復.36) 의 니힐리즘이다.

고은 <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