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잃어버린 정권' 안 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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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또 앞이 보이지 않는 정국이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정치다운 정치 한번 보여준 적 없고, 국회다운 국회 한번 열어 본 일이 없다.

30년 전 보던 그대로 대치정국이고, 10~20년 전과 꼭 마찬가지의 파행정국이다.

지금이 어느 시대라고 "이런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 정치를" 하고 개탄해 봐야 소용없는 노릇이고, 문제는 새 길을 찾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정부 시작후 처음 열리는 정기국회를 마냥 표류케 해서는 안된다.

나라 안팎 사정을 생각해서라도 국회는 기어코 열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침몰 직전에 있다.

이 심각한 위기를 모르는 사람은 오직 정부를 포함해 여야 정치권만이라고 국민들은 느끼고 있다.

이제 정치권은 진실로 겸허한 자세로 돌아가 진정으로 자기성찰을 해봐야 할 것이다.

이것말고 우리 정치권은 달리 해법이 없다.

야당은 국세청을 통한 대선자금 모금이 검찰이 밝힌 그대로라면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다.

여야 어느 정당이고 대선자금의 불법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국가기관을 통한 모금의 불법성은 그 누구도 용납할 수 없다.

특히 대법관 경력을 지닌 이회창 (李會昌) 총재는 지난날의 대법관 지위에 맞는 양심과 양식으로 누구보다 이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

이를 "정치사정" "야당파괴 행위" 라는 주장으로는 그 누구도 이해시킬 수 없다.

민주주의는 법치다.

불법을 법으로 척결하는 것과 정치행위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국민들의 정부.여당에 대한 질타도 그 수위가 야당보다 조금도 낮지 않다.

그 정치행태는 '김영삼 (金泳三) 따라하기' 만 같다.

정치력의 부재는 흡사 장면 (張勉) 시대를 연상시킨다.

정부.여당의 가장 큰 실책은 개혁과 사정을 등식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철새 정치인들이 줄을 이어 나오고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정당체계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치개혁, 이런 정치사정은 자기당 (黨) 이기주의를 향한 음모로 생각되기 일쑤다.

그래서 현정부.여당이 하는 모든 정치행위를 '음모' 의 시각에서 보는 국민이 야당이 아니라도 부지기수다.

이유는 사정 (司正) 이 여당을 비리의원들의 피난처로 만들고 있고 사정이 바로 여당 세 (勢) 불리기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에 의한 수늘리기와 세불리기는 김영삼 정부도 똑같이 했고 그 이전 정부들도 심심치 않게 했다.

이 모두 역대정권들이 자기당 이기주의를 위해 써먹던 방법이어서 정부만 바뀌면 으레 '정치개혁' 을 선언하고, 정치개혁하면 으레 '사정' 을 생각하고, 사정하면 으레 '표적수사' 를 지목한다.

그리고 야당의원들의 탈당사태가 벌어지고 의회는 민주주의 억압이다 해서 파행상태로 들어가고, 1년이면 반 이상 식물국회가 된다.

그러면서 칼자루를 쥔 정권은 끊임없이 '개혁' '개혁' 한다.

그리고 그 개혁은 실패로 끝난다. 현정부.여당의 행태도 너무나 똑같아 국민들은 개혁이라는 말만 나와도 그 다음 순서가 어떻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상당수의 국민들은 그런 정치개혁에 혐오증을 느끼고, 또 상당수 국민은 소름끼쳐 하기도 한다.

머잖아 벌어질 청문회도 또 어떤 '한풀이' 가 될 것인가를 국민들은 이미 훤히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정권의 담당자들이 '우리도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는 것을 빨리 깨닫는 것이다.

그 깨달음이 정치개혁의 시작이며 개혁성공의 싹이다.

그런데 이 정권 담당자들도 이전 정권 담당자들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외' 다 하고 있다.우리만은 '그들' 과 엄청난 차별성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개혁은 '착각' 으로 되지 않는다.

더구나 정치개혁은 민주주의라는 실제와 원칙이 늘 따라 다니기 때문에 엄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사정과 개혁은 엄격히 분리돼야 한다.

사정하면서 개혁을 내세우면 안되고, 개혁하면서 사정하면 안된다.

사정으로 상대당의 비리의원을 위협해 철새로 만들고, 그리고 내 당으로 끌어 넣으면 그 자체가 비리가 된다.

그 비리를 저지르며 개혁을 부르짖으면 모든 개혁은 정치음모론으로 전락한다.

지금 정부.여당이 정치음모론에서 벗어나 파행국회를 정상국회로 만들고, 개혁을 성공시키려면 영입한 비리의원들을 다시 모두 탈당시켜 무소속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수 (數) 와 세 (勢)가 아니라 정치력 (力) 으로 정치를 이끌어 가야 한다.

힘과 자리, 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정부.여당이 정치력을 발휘해 국회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면 김영삼 정권과 마찬가지로 또 '잃어버린 정권' 이 된다.

국민은 그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송복(연세대교수.정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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