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흥해 송라 도중 바다를 보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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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세찬 바람 갑자기 일어 바다를 뒤집으

하늘과 물이 서로 붙어 캄캄해 진다.

만 송이 은산 (銀山) 은 낮아졌다 다시

일어서고

백 가지 천 가지 우레 북은 한 소리로

어울린다

부상 (扶桑) 떠나갈 듯 지축이 흔들리고

용왕은 궁전이 무너질까 걱정이리라

- 고려 박효수 (朴孝修.?~1377) '흥해 송라 도중 바다를 보며'

한국시가 중에는 이런 우렁찬 낭만주의 시가 드물다.

많은 시인은 지나치게 낭만에 묻히는데 시 자체로 형상화되는 데는 미치지 못하는 일이 적지 않다.

이 성난 바다를 노래한 고려 시인에게는 그 황량한 파도들을 '만 송이 은산' 으로 말하고 그 파도치는 소리를 천 가지 우레 북으로 노래하는 사내다운 비유가 동해의 극치에 딱 맞아떨어진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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