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제4장 서까래를 치면 기둥이 운다

철규의 방에서 노크 소리가 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이상이 흘러간 밤 11시반쯤이었다.

문을 열었을 땐 가운을 걸친 채로인 승희였다.

승희는 문을 열어주는 철규의 등뒤로 방안을 힐끗 살폈다.

태호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복도 밖으로 반쯤 고개를 내민 채인 철규에게 고개를 숙인 채인 승희는 말했다.

"무서워서 잠잘 수 없어요. " 어떤 핑계를 위해 조작된 말 같겠지만 진정이었다.

그러나 철규는 선뜻 동의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가운 차림인 그녀를 복도에 세워둔 채로 철규는 나직이 물었다.

"무섭다니? 철부지들처럼 왜 그래?" "어떡하면 좋죠? 혼자 잔 일이 한두 번 경험한 것도 아닌데…. " 그녀는 철규를 빤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서워진 까닭을 그가 냉큼 깨달아 도어를 크게 열며 길을 비켜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철규는 그때까지도 머뭇거리고 있다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한마디를 던졌다.

"돌아가 있어요. 옷 챙겨 입고 금방 건너갈게. " 승희는 그제서야 소스라쳤다.

얼떨결에 도어를 열어준 철규는 러닝셔츠에 팬티 바람이었다.

그때서야 자신도 가운 차림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방으로 돌아와 나타날 철규를 기다리고 있었다.

참고 더 기다리지 못했던 것이 후회되었다.

철규가 선뜻 건넨 말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방으로 찾아올 적당한 시간을 예민한 촉각으로 고르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녀의 성급했던 상상력 때문에 철부지로 보인 것이 잠시 동안이나마 계면쩍었다.

그녀는 황급히 핸드백을 끌어당겨 열었다.

그러나 바쁘게 찾고 있는 그 물건은 좀처럼 손에 집히지 않았다.

한동안 실랑이를 하다가 끝내는 핸드백 전체를 거꾸로 뒤집어 방바닥에 쏟아부었다.

여러개의 화장품들이 이부자리 위로 툭툭 떨어졌고, 그 중에서 드디어 찾고 있었던 향수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재빨리 뚜껑을 열고 겨드랑이에 그리고 목덜미 근처에 향수를 발랐다.

주문진을 출발할 때, 평소에는 탁자 아래에 떨어져 뒹굴기만 했던 앙증맞은 향수병이 문득 시선에 잡혀 왔었다.

난데없는 향수병의 발견은 막연했지만, 얼핏 철규에 대한 예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화장품보다 먼저 향수병을 핸드백에 집어 넣으며 이상한 쾌감 같은 것이 가슴 뭉클했던 것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서둘러 방을 정돈한 승희는 두 무릎을 세운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러나 한동안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옆방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철규가 서둘러 옷을 챙겨 입는 선뜻한 분위기 때문에 태호가 잠을 깬 것일까. 그렇다면, 곧장 방을 나서기란 쉽지 않을 것이었다.

철규의 처지로선 그가 다시 잠들기를 기다릴 것이 분명했다.

좀 더 자제력을 가지고 진득하게 기다리지 않았던 것이 다시 한번 후회스러웠다.

잠이 깬 태호가 낌새를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철규도 같이 잠들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불길한 생각을 될수록 하지 말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다시 도어의 잠금장치가 풀려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도어로 다가갔다. 핸들은 손쉽게 열렸다.

이미 불이 꺼진 복도를 바라보았다.

인기척이 없던 복도 끝 계단에서 한 쌍의 젊은이들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유난히 하얀 두 다리가 아슬아슬하게 짧은 치마 아래로 드러난 앳된 여자는 취한 거동을 보이고 있는 키큰 남자 앞장에 서서 그녀의 방 앞을 아무런 거리낌도 두지 않고 당당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의 손을 잡아끌듯 하고 있었다.

두 객실을 지나친 방 도어 앞에 걸음을 멈춘 그녀는 숙련된 솜씨로 도어를 열고 남자와 함께 안으로 사라졌다.

승희의 객실문이 아무런 기척도 없이 열리고 철규의 얼굴이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