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18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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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구워지는 오징어를 바라보고 있던 태호의 입에서 한마디가 불쑥 흘러나왔다.

"잔인한 표현이지만, 오징어 굽히는 모습이 섹시한데요 - ." 철규는 시큰둥한 반응이었지만, 승희는 동의가 담긴 눈짓을 태호에게 보냈다.

그날밤은 삼척에서 묵기로 하였다. 저녁밥을 마친 그들은 시장 근처에 있는 단골여관으로 찾아 갔다. 승희가 든 3층 객실에는 샤워기가 설치된 조그만 욕탕이 있었다. 종일 흘린 땀으로 끈적거렸던 그녀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서둘러 옷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욕탕으로 뛰어들었다. 샤워를 한껏 틀어놓고 얼굴을 쳐들었다.

목젖까지 차올랐던 몸의 열기가 상쾌하게 식으며 긴장과 땀으로 절었던 하루의 일과도 아침 안개처럼 스러졌다.

몸을 닦으며 그녀는 혼자 불쑥 웃었다. 낮의 철규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장꾼인 것처럼 가장하고 태호와 주고받았던 만담투의 대화는 지금도 외울 수 있을 만치 뇌리에 명료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도시의 가면을, 그리고 열적음을, 알량한 체통 같은 것을, 소극적인 것을, 나태의 땟국을 한 가지씩 벗어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변해야 한다는 자각이 그를 뒤흔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 하루였다.

그가 오늘밤 혼자인 자신의 방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녀는 서둘러 욕탕을 나왔다. 방 윗목에 자리잡은 대형 거울과 마주쳤다.

작은 방에 어울리지 않게 큰 거울이 걸려 있었다. 굴곡이 잔잔한 그녀의 전라가 거울 위에 온전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녀의 등뒤로 보이는 거울 속으로 도어가 비치고 있었다. 그 문으로 열적은 모습으로 들어서는 철규의 모습을 그녀는 잠시 상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수건으로 축축한 몸을 닦은 다음 이미 깔려 있는 이부자리 위에 천장을 바라보며 반듯이 드러누웠다.

선풍기 바람이 그녀의 살결을 아래 위로 스치고 있었다. 체모가 바람에 감촉하는 느낌도 선명했다. 바로 옆방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철규와 태호가 들어 있는 방이었다. 지금 자기가 어떤 모습으로 누워 있는가를 철규는 한번쯤 상상해 보았을까. 망할 자식. 그리고 그녀는 또 다시 혼자 중얼거렸다.

망할 자식. 그러나 안타까울 뿐 욕설이 가진 배설의 쾌감 따위는 느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소스라쳤다. 벌떡 몸을 일으킨 그녀는 도어로 다가가 잠금장치를 풀어놓았다. 그리고 다시 이부자리 위로 돌아와 반듯이 누웠다.

방으로 들어올 때, 무의식적으로 도어를 잠근 것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열어둔 도어핸들을 뚫어질 듯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옆방에서 또 다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왔다. 눈은 도어핸들에 그리고 귀는 옆방과 사이를 지른 벽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는 벗어 두었던 시계를 보았다. 밤 10시였다.

해가 뜨려면 새벽 6시쯤, 아직도 8시간이란 길고 긴 어둠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벗고 있는 자신을 상상할 수 없는 사내라 할지라도 혼자 누워 있는 자신을 잊어버리는 않겠지. 긴 시간 동안 한 번이라도 저 도어를 가만히 열고 낯설지 않은 여자의 방으로 들어올 수 있는 남자겠지. 그녀는 갑자기 뛰기 시작하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녀는 일어나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아 그랬구나 했던 그녀는 서둘러 욕탕으로 뛰어들었다. 혼자서만 바빴던 나머지 이빨 닦는 것을 잊고 방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비로소 가운을 찾아 갈아입었다.

텔레비전의 채널을 맞춰보았다. 그러나 연속극에도 몰두할 수 없었다.

스위치를 끄고 방의 전등도 꺼버렸다. 어둠이 깃들인 방에 다시 바깥 거리의 잔광들이 새어들어와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내일 아침 해가 뜨도록 철규는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열어둔 도어를 열고 철규 아닌 괴한이나 도둑이 불쑥 기어들지도 몰랐다.

예측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지금,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오히려 괴한의 침입이 철규가 찾아오는 것보다 높은 가능성을 갖고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 순간, 승희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 도어핸들을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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