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의 그린수기]19.중3때 첫승후 주위시선 돌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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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골프대회가 끝나고 나면 우승을 했든 못했든 항상 왠지 허탈해진다.

그럴 때면 다음 대회 장소로 이동하는 비행기 안에서 애완견 해피를 안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허탈감을 씻는 좋은 기회가 되곤 한다.

나에 관한 신문기사를 읽기도 하지만 요즘에는 온통 내 기사밖에 없어 다 읽지도 못할 지경이다.

불과 6년전만 해도 '한국 골프의 기대주' 에 불과했던 내가 이렇게 빨리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는 게 도무지 실감나지 않는다.

'촌뜨기' 로 무시당하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내가 중3 때인 92년 라일앤스코트오픈대회에서 우승하자 콧대 높던 동료 선수들의 학부모들도 나를 차츰 골프선수로 인정해 주기 시작했고 아버지도 더 이상 기사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으며 "두고봐라" 를 외치지 않게 됐다.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아버지에게 기자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려댔기 때문이다.

나와 아버지가 현재 받고 있는 '대접' 에 비하면 비교도 안될 정도지만 당시 우리가 느꼈던 기분은 지금보다도 훨씬 좋았다.

아버지는 그때 "세리야. 전에는 인사를 해도 안 받아주던 사람들이 나한테 먼저 와서 아는 체 하는 거 있지" 하시며 싱글벙글하던 모습이 새롭다.

대전 유성에서는 몇몇 분들이 후원회를 구성해 본격적으로 나를 밀어주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분들을 일일이 거명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꼭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

라일앤스코트오픈대회를 제패했던 92년 나는 중고연맹회장배.한국여자오픈.일동슈퍼시리즈 여자 아마추어 1위를 차지했다.

내가 연거푸 4승을 일궈내자 언론에서는 야단스럽게 나를 띄워 올렸다.

나의 코치였던 아버지는 내가 자칫 오만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훈련의 고삐를 더욱 바짝 죄었다.

새벽 러닝과 계단 오르기, 1천개의 공을 때리는 스윙연습 등이 매일 반복됐다.골프대회에 참가하는 날이 나에게는 공식적인 유일한 휴가기간이었다.

어느 대회에서인가 나를 잘 아는 기자분이 "또 우승해 기쁘겠네" 하고 말을 건넸는데 내가 "쉬는 날이 끝나서 섭섭하다" 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얼떨떨해 하던 표정이 생각난다.

93년 공주 금성여고에 진학한 나는 그해 봄 양주골프장에서 벌어진 톰보이오픈에서 우승, 라일앤스코트오픈에 이어 2승을 올린 최초의 골퍼로 등록됐다.

3학년 때인 95년에는 많은 일이 벌어졌다.

톰보이오픈.미도파오픈.크리스찬디올오픈.서울여자오픈 등 4개 대회를 석권했다.

아마추어였기 때문에 받지 못한 상금만도 1억원이 넘었다.

그해 내 성적표는 참 화려했다.

오픈대회 4관왕에 아마대회 3관왕 등 시즌 7승. 내 이름 앞에는 '무서운 아이' '슈퍼 소녀' 등 갖가지 수식어가 붙어다녔다.

그해 겨울 나는 프로행을 결심했고, 삼성으로부터 뜻밖의 제의가 들어온 것도 이 시기였다.

삼성과의 만남은 나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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